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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의 과학카페] 생쥐에도 통하는 플라시보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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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의 과학카페] 생쥐에도 통하는 플라시보 효과

2024.09.04 12:00
플라시보.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플라시보(위약) 효과는 정신과 신체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네이처,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학술지 논문에서 언급하는 참고문헌은 대부분 학술지에 실린 논문이고 가끔 특정 분야를 주제로 전문가들이 한 장씩 맡아 쓴 글을 모은 편저도 보인다. 지난주 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한 논문의 첫 문장 '플라시보(위약) 효과는 정신과 신체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에 붙은 참고문헌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과학 교양서다. 


2008년 앤 해링턴 미국 하버드대 과학사 교수가 쓴 '내면의 치유: 심신의학의 역사'로 이듬해 '마음은 몸으로 말을 한다'는 제목으로 한글판이 나왔다. 지난 주말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논문과 관련된 3장 '긍정적 사고의 힘'을 읽어봤다.

 

내용 가운데 긍정적인 사고가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의학계가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된 논문 얘기가 특히 흥미로웠다. 1976년 권위 있는 학술지 '뉴잉글랜드의학회지'에 실린 논문 '질병 해부학'의 저자가 의사가 아니라 언론인, 그것도 정치 분석가였기 때문이다. 


'새터데이 리뷰'의 편집자 노먼 커즌스는 1960년대 강직성척추염이라는 치료 가능성 0.2%인 사실상 불치의 퇴행성 질환 진단을 받고 절망하는 대신 자가치료를 해보기로 했다. 그는 문헌을 조사하다 부정적인 감정이 인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생리학자 월터 캐넌의 발견을 읽고 "긍정적인 감정... 사랑, 희망, 신뢰, 웃음, 자신감, 살고자 하는 의지는 치료 효과가 있지 않을까?"라는 역발상을 떠올렸다.


커즌스는 주치의의 허가를 받고 퇴원해 진통제 대신 비타민C를 과량 복용하고 식단을 바꾸고 코미디 영화와 유머가 담긴 책을 읽었다. 그 결과 "한때 거의 마비 상태까지 간 나는 푸에르토리코에서 서핑을 하고 해변에서 조깅을 한 뒤 마침내 '새터데이 리뷰'에 풀타임으로 근무했다"고 논문에 썼다. 

 

정치 전문 언론인에서 의대 의료인문학 교수가 된 노먼 커즌스는 난치병인 강직성척추염을 극복한 과정에서 플라시보 효과의 힘을 높게 평가했다. NASA 제공
정치 전문 언론인에서 의대 의료인문학 교수가 된 노먼 커즌스는 난치병인 강직성척추염을 극복한 과정에서 플라시보 효과의 힘을 높게 평가했다. NASA 제공

만일 그가 유명 언론인이 아니었다면 '뉴잉글랜드의학회지'가 일개 환자의 회복기를 논문으로 인정해 실어줄 일은 없었겠지만 아무튼 이 논문은 환자 치료보다 본인 야망을 중시한다며 대중의 불만을 사던 당시 주류 의학계가 환자 역시 치료의 능동적인 주체로 참여해야 한다는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논문에서 커즌스는 아래와 같은 흥미로운 언급을 했다. 


"내 모든 경험이 그저 플라시보 효과에 불과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만일 그렇다면 플라시보 효과가 어떤 특성을 지녔을지 면밀히 조사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는 아주 커다란 문을 여는 일일 것이고 어쩌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 때보다 더 큰 세상이 열릴지 모른다."


커즌스의 논문이 나왔을 때만 해도 거짓말 또는 착각이라고 여겼던 플라시보 효과는 그 뒤 커즌스의 바람대로 면밀한 조사(연구) 끝에 실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인정됐고 관련된 뇌과학도 꽤 밝혀졌다.

 

예를 들어 플라시보 진통 효과를 느낄 때 뇌의 입쪽전방대상피질(rACC)이 활성화된다. rACC는 기억과 감정을 조절하는 소위 '포유류의 뇌'로 불리는 변연계에 존재하므로 수긍이 가는 결과다. 그러나 관련한 뇌의 신경회로는 여전히 모르는 상태였다.


● 조건화 실험으로 플라시보 효과 유도


노스캐롤라이나대가 주축이 된 미국 공동연구자들은 동물실험을 통해 플라시보 진통 효과 신경회로를 밝힌 논문을 지난주 '네이처'에 발표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을 대상으로 믿음의 힘인 플라시보 효과를 어떻게 구현할지 의문이 들 독자도 있을 텐데, 연구자들은 기발한 실험을 설계해 이 일을 가능케 했다.

 

 

최근 생쥐를 대상으로 한 행동 실험을 통해 플라시보 진통 효과에 관여하는 신경회로가 밝혀졌다. 바닥 온도가 다른 두 방에서 3일을 보낸 생쥐는 30℃였던 방이 48℃가 돼도 여전히 선호할 뿐 아니라 고온 통증 반응도 약하다(위). 이 플라시보 진통 효과의 신경회로를 규명한 결과 변연계의 입쪽전방대상피질(rACC)과 중뇌의 교뇌핵(Pn), 소뇌(cerebellum)의 특정 영역이 네트워크를 이루고 이 과정에 오피오이드 수용체가 관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아래). 네이처 제공
최근 생쥐를 대상으로 한 행동 실험을 통해 플라시보 진통 효과에 관여하는 신경회로가 밝혀졌다. 바닥 온도가 다른 두 방에서 3일을 보낸 생쥐는 30도였던 방이 48도가 돼도 여전히 선호할 뿐 아니라 고온 통증 반응도 약하다(위). 이 플라시보 진통 효과의 신경회로를 규명한 결과 변연계의 입쪽전방대상피질(rACC)과 중뇌의 교뇌핵(Pn), 소뇌(cerebellum)의 특정 영역이 네트워크를 이루고 이 과정에 오피오이드 수용체가 관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아래). 네이처 제공

연구자들은 각각의 바닥이 따로 난방되는 투룸 공간을 만들었다. 처음 3일 동안은 두 방 모두 쾌적한 30℃로 맞춰 생쥐는 내키는 대로 돌아다녔다. 그 뒤 4일차부터 3일 동안 2번 방의 바닥 온도를 48℃로 올렸다. 뜨거워서 깜짝 놀란 생쥐는 여전히 30℃인 1번 방에 주로 머물렀다. 그리고 7일차에 1번 방의 바닥도 48℃로 올린 뒤 생쥐의 행동을 관찰했다. 


이제 두 방의 바닥 온도 모두 불쾌함을 느끼는 48℃로 같아졌음에도 생쥐는 여전히 1번 방에 주로 머물렀다. 여기까지는 전날의 기억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고온으로 인한 통증에 대한 반응 행동도 달랐다.

 

1번 방에 머무를 때는 발바닥을 핥거나 점프하는 빈도가 2번 방에 있을 때보다 낮았다. 행동만 보면 1번 방에 있을 때 덜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이고 이는 앞선 3일의 경험이 플라시보 효과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연구자들은 신경과학과 유전학의 최신 기법을 동원해 생쥐가 플라시보 효과를 느낄 때 입쪽전방대상피질(rACC)과 연결돼 활동이 바뀌는 부위와 뉴런을 찾았다. 그 결과 뜻밖에도 rACC에서 중뇌의 교뇌핵(Pn)으로 신호가 전달되고 Pn에서는 소뇌의 특정 영역으로 신호가 전달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중뇌는 '파충류의 뇌'라고 불릴 정도로 원초적인 생리(호흡, 체온, 수면, 식욕 등)를 조절하는 영역이고 소뇌는 운동과 자세 조율에 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 플라시보 효과는 기대 또는 의지라는 인지 과정의 결과로 해석되기 때문에 rACC에서 신피질(소위 '인간의 뇌'라고 부르는)로 연결되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다면 오히려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한편 rACC와 연결된 Pn의 뉴런에서 오피오이드 수용체 유전자가 발현됐다. 오피오이드는 아편류 약물을 뜻하는 용어다. 우리 몸이 만드는(내인성) 오피오이드인 엔도르핀이나 마약성 진통제 성분인 모르핀이 수용체에 달라붙으면 진통 효과가 난다. 


흥미롭게도 오피오이드 수용체는 플라시보 통증 효과와 관련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오피오이드 수용체를 차단하는 약물인 낼럭손을 투여하면 플라시보 진통 효과가 사라진다. 실제 생쥐의 Pn에 오피오이드 수용체 차단 약물을 투여한 뒤 행동을 분석한 결과 플라시보 진통 효과가 크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 파충류 뇌는 내용보다 형식 중시


얼핏 모순돼 보이는 이번 결과는 플라시보 효과의 특이한 측면을 고려하면 오히려 더 그럴듯할지도 모른다. 환자들이 플라시보인지 알고 약을 복용하거나 처치를 받아도 여전히 플라시보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몸으로 말을 한다'에도 그런 예가 나온다. 무릎 만성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절반은 진짜 수술을 하고 절반은 피부 절개만 하고 바로 꿰매는 플라시보 수술을 한 결과 양쪽 모두 객관적인 기능 평가 결과 상태가 호전됐다. 


더 놀라운 건 플라시보 수술을 받은 환자들이 그 사실을 통보받은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일 플라시보 효과에 기대와 의지 같은 인지 영역이 크게 작용한다면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안 뒤 플라시보 효과가 사라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1976년 '질병 해부학' 논문으로 의학계의 유명인사가 된 커즌스는 수년 뒤 '새터데이 리뷰'를 떠나 LA 캘리포니아대 의학부 의료인문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1979년 출간한 '웃음의 치유력'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고 보면 웃음치료 또는 웃음요가에서 주장하는 '가짜(비자발적) 웃음도 효과가 있다'는 말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억지로 웃더라도 근육과 호흡의 변화가 진짜 웃음과 비슷해 식별력이 떨어지는 뇌간이나 소뇌 같은 뇌의 원초적인 부위가 진짜로 웃을 때처럼 해석해 생리 반응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지만 많은 사람이 형식을 차리는 데 돈과 시간을 들이고 있다. 지금까지 필자는 이런 모습을 한심하게 여겼는데 어쩌면 형식도 내용의 일부(그것도 중요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하는 데 여전히 상당한 역할을 하는 파충류 뇌는 인류의 진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형식 정보를 통해서 내용을 추측하고 적절한 대응을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email protected]).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7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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