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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의 과학카페] '헬리코박터 파일로리'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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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의 과학카페] '헬리코박터 파일로리'의 운명

2024.08.21 13:00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의사 중에는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무모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은 의사를 믿고 몸을 맡긴 환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 희생되지만 때로는 자기 몸을 내놓은 용기 있는 의사도 있다. 


예를 들어 19세기 독일의 위생학자 막스 폰 페텐코퍼는 로베르트 코흐가 콜레라가 창궐하는 인도에 가서 원인균을 찾아 가져왔다는 얘기를 듣고 코흐에서 콜레라균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74세의 페텐코퍼는 콜레라균이 우글거리는 액체를 남김없이 마신 뒤 "내가 콜레라에 걸리는지 지켜보자!"며 큰소리쳤다. 


페텐코퍼가 이런 무모한 행동을 한 것은 "콜레라에 걸리는 건 세균과 관련이 없고 지하수(물)에 대한 개인의 기질 때문이다"라는 강력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몸으로 주장을 증명했다고 생각했지만 과학계는 코흐의 손을 들어줬다. 다만 페텐코퍼의 사례에 대해서는 "병원체는 발병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라고 해석했다. 페턴코퍼의 생각도 절반은 맞는 셈이다.

 

 

독일의 위생학자 페텐코퍼는 세균이 콜레라를 일으킨다는 주장을 반증하려고 세균 배양액을 마셨고(왼쪽) 호주의 의사 배리 마셜은 세균이 위염을 일으킨다는 주장을 입증하려고 배양액을 마셨다(가운데). 반면 마셜의 공동연구자 로빈 워런은 차마 배양액을 마시지 못했다(오른쪽). 서호주대 제공
독일의 위생학자 페텐코퍼는 세균이 콜레라를 일으킨다는 주장을 반증하려고 세균 배양액을 마셨고(왼쪽) 호주의 의사 배리 마셜은 세균이 위염을 일으킨다는 주장을 입증하려고 배양액을 마셨다(가운데). 반면 마셜의 공동연구자 로빈 워런은 차마 배양액을 마시지 못했다(오른쪽). 서호주대 제공

페텐코퍼가 병에 안 걸릴 거라고 확신하고 세균을 마셨다면 반대로 병이 나기를 바라며 세균을 마신 과학자도 있다. 호주의 의사이자 미생물학자인 배리 마셜로 위염 환자의 위에서 찾아낸 세균이 위염을 일으킨다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배양액을 마셔 위염을 유발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자기희생(?) 덕분에 마셜은 21년이 지난 2005년 위염과 위궤양을 일으키는 원인균인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를 발견한 업적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마셜의 에피소드는 워낙 유명해 독자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2005년 노벨상을 함께 받은 병리학자 로빈 워런에 대해서는 잘 모를 것이다. 워런은 마셜에게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를 배양할 동기를 부여한 사람으로 숱한 실패 끝에 운 좋게 배양에 성공한 마셜이 원인균임을 같이 증명해보자고 제안했을 때 거절하는 바람에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다. 


얼마 전 '뉴욕타임스'에 7월 23일 워런이 향년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는 부고 기사가 실렸다. 19년 전 노벨상 수상자 발표 때 봤을 것임에도 까맣게 잊고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발견을 마셜의 업적으로만 알고 있던 필자는 미안한 마음에 기사를 찬찬히 읽어봤다.


● 정신과 전문의 대신 병리학자로


1937년 호주 노스애들레이드에서 태어난 워런은 애들레이드의대를 졸업한 뒤 정신과 전문의가 되고 싶었지만 레지던트 과정에 들어가지 못해 임상병리학을 선택했다. 아마도 환자의 몸을 직접 상대하는 데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 대신 환자에게서 채취한 각종 생체시료를 분석하는 과학자의 길을 걸었다.


로열퍼스병원에서 근무하던 워런은 1979년 위내시경 검사에서 채취한 위 조직 표본에서 나선형 박테리아를 발견했다. 이와 함께 염증의 흔적이 관찰되자 워런은 이 박테리아가 위염을 일으킨다고 주장했지만 위는 강산이라 무균 상태라는 당시 의학 상식을 흔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때 나타난 협력자가 1977년 병원에 온 젊은 의사 마셜로 조직에서 얻은 박테리아를 실패 끝에 운 좋게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은 이 발견을 1983년과 1984년 저명한 의학저널 '랜싯'에 발표하며 연관성을 시사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이를 입증하기 위해 배양한 세균을 실험동물에 투여해 위염을 유발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병원체는 숙주 특이성이 있을 수 있으므로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남아 있었고 1984년 33살의 마셜이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감염이 위염과 위궤양을 일으킨다는 가설이 받아들여졌고 그 뒤 위암 발생에도 관여한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는 암을 일으키는 것으로 확인된 유일한 세균이다.


● 항생제 치료로 위암 발생률 13% 줄여


부고를 읽다가 문득 며칠 전 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린 뉴스가 생각났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를 없애면 위암 발생이 준다는 제목이라 '뻔한 얘기를 왜 하지?'라고 의아해하며 넘어갔는데 다시 찾아봤다. 워런이 세상을 떠나고 1주일이 지난 7월 30일 학술지 '네이처 의학' 사이트에 올라온 논문을 소개했는데 헬리코박터 파일로리와 위암의 관계를 밝힌 최초의 대규모 장기간 추적 연구라는 내용이다.


우리나라, 일본과 함께 위암 발병률이 높은 중국에서 진행된 연구로 2011년 산둥성 주민 18만여 명을 대상으로 감염 여부를 검사해 양성 반응이 나온 10만여 명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쪽은 10일 동안 항생제 치료를 했고 대조군은 위염 증상을 완화하는 항염증제 치료만 했다. 12년이 지나 추적 조사한 결과 항생제 투여 그룹에서는 위암이 354건, 대조군에서는 399건이 발생했다.


결국 10일 동안 항생제 치료가 12년 사이 위암 발병률은 13% 줄인 셈이다. 한편 항생제 투여 그룹에서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가 박멸된 73%만을 대상으로 분석하면 19%가 줄었다. 나이에 따른 효과도 달라 2011년 당시 45세 미만인 사람 가운데 항생제 치료로 세균을 박멸한 경우 발병률이 35%나 감소했다. 


한중일 세 나라 가운데서도 위암 발병률이 가장 높은 일본은 2013년부터 건강검진에서 양성일 때 항생제 치료를 받으면 보험처리가 되면서 2019년까지 850만 명이 치료를 받았다. 모델링 연구 결과 이들의 예상 수명 동안 위암 발생과 사망자가 각각 28만여 명과 6만여 명 줄어 의료비를 4조 원 이상 절감하는 것으로 나왔다.

 

 

동아시아 한중일 세 나라의 위암 발생률은 세계 평균의 서너 배에 이른다. 반면 인도 등 남아시아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감염률이 더 높음에도 위암 발생률이 동아시아의 수십 분의 1에 불과해 이런 현상을 ′아시아 수수께끼′라고 부른다. 이 현상은 지역에 따른 균주의 병원성 차이와 인종의 염증 및 위암 관련 유전자 변이 차이, 식단 등 환경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의 장류와 젓갈 같은 짠 음식을 즐겨 먹으면 위 점막이 손상될 뿐 아니라 병원성이 큰 균주가 우점종이 돼 위염이 생기기 쉽고 만성화되면 위궤양과 위암 발생 위험성이 커진다. WJGO 제공
동아시아 한중일 세 나라의 위암 발생률은 세계 평균의 서너 배에 이른다. 반면 인도 등 남아시아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감염률이 더 높음에도 위암 발생률이 동아시아의 수십 분의 1에 불과해 이런 현상을 '아시아 수수께끼'라고 부른다. 이 현상은 지역에 따른 균주의 병원성 차이와 인종의 염증 및 위암 관련 유전자 변이 차이, 식단 등 환경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의 장류와 젓갈 같은 짠 음식을 즐겨 먹으면 위 점막이 손상될 뿐 아니라 병원성이 큰 균주가 우점종이 돼 위염이 생기기 쉽고 만성화되면 위궤양과 위암 발생 위험성이 커진다. WJGO 제공

사실 우리나라의 위암 발생률도 항생제로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를 없앤 덕분에 꽤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암 발생 순위(갑상샘암 제외)를 보면 위암은 줄곧 1위를 차지하다가 2020년에는 폐암, 대장암에 밀려 3위로 내려왔다. 10만 명 당 발생자도 2010년 60.3명에서 2020년 51.9명으로 줄었다.


문득 페텐코퍼와 마셜의 결과가 반대였다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을까 궁금하다. 만일 페텐코퍼가 콜레라균을 마시고 콜레라에 걸려 바로 사망했으면 저명한 위생학자의 틀린 판단이 화제가 됐겠지만 코흐의 명성이 워낙 높아 콜레라가 세균성 전염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시기에 별 영향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면 마셜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배양액을 마시고도 멀쩡했다면 연구는 갈피를 잃고 인과관계는 한참 뒤에 어쩌면 다른 연구자에 의해 밝혀졌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만일 워런이 바라던 정신과 레지던트 과정에 합격해 병리학자가 되지 않았다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의 발견은 아마도 꽤 늦어졌을 것이고 어쩌면 아직도 존재를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신과에서 그를 떨어뜨린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항생제 치료로 위염과 위궤양의 고통에서 벗어났고 위암 발생을 피할 수 있었다. 특히 위암 발생률이 높은 한중일의 사람들이 가장 덕을 본 셈이다.


"인류에 가장 큰 혜택을 준 사람들을 선정해 상을 주라"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꼭 맞는 수상자가 워런과 마셜 아닐까. 로빈 워런 박사의 명복을 빈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email protected]).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7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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