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축장서 고기맛 본 카이스트 수학 영재...연 매출 2천억 스타트업 키웠다는데 [남돈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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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8.31. 오후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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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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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연 ‘정육각’ 대표 인터뷰
美국무성 장학생 발탁, 유학 앞두고
시작한 고기판매업이 인생 바꿔
도축부터 당일·새벽 배송까지
4일 안에 가능한 혁신 시스템 구축


김재연 ‘정육각’ 대표. <정육각>
딱 4일.

고객이 온라인을 통해 돼지고기를 주문하면 도축부터 배송까지 빠르면 당일, 길면 4일 걸린다. 즉 고객은 매우 신선한 돼지고기를 택배로 받을 수 있다. 닭이 낳은 지 하루가 안 된 달걀, 착유한 지 하루가 안 된 신선한 우유도 빠르면 주문 당일 보내준다. 이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는 온라인으로 고기를 판매하는 스타트업 ‘정육각’이다.

일반적으로 마트에서 판매하는 고기는 도축, 육가공, 세절, 소매 등 여러 과정을 거친다. 판매경로가 복잡하기 때문에 도축부터 소비자에게 걸리는 기간이 아무리 짧아도 4일 안에는 불가능하며, 길면 한 달 이상 소요된다.

정육각은 2016년 2월 창업 초기부터 스타트업계에서 주목받았다. 정육각 사업 모델의 성장 가능성과 창업자인 김재연 정육각 대표에 관심 갖는 투자자들이 생기면서 정육각은 설립된 그 해 벤처캐피털(VC)로부터 수억원대의 초기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이후 또 다른 투자자가 나타나 몇 달 후 또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

김 대표는 수학, 과학 영재로 선발돼 한국과학영재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카이스트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2016년 2월 카이스트 졸업 후 미국 국무성 장학금을 받아 같은 해 8월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응용수학을 공부할 예정이었다. 유학 자금 마련 등을 위해 고기판매업에 뛰어들었다가 유학 계획을 접고 창업가가 됐다.

2022년 정육각은 스타트업계에서 엄청난 화제가 된 기업이기도 하다. 대상그룹이 계속 적자상태를 기록해 그룹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유기농 식품 판매점 ‘초록마을(기업명도 초록마을로 동일)’을 2021년 매물로 내놨는데, 이를 스타트업인 정육각이 2022년 4월 인수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대기업 계열사를 우리나라 스타트업이 인수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당시 이마트 등 여러 굵직한 기업들이 초록마을 인수에 눈독을 들였지만, 스타트업인 정육각이 초록마을 인수에 성공했다. 당시 인수가격은 800억원대였다.

정육각은 김 대표가 친구와 모은 돈 500만원으로 2016년 2월 경기도 안양시에 위치한, 재개발을 앞둔 아주 낡고 좁은 상가에서 출발했다. 정육각 제품은 자사 홈페이지, 애플리케이션(앱)에서만 구입 가능하다. 자사 제품 외에 타 업체나 브랜드 제품을 위탁 판매하지 않는다. 정육각 서비스를 이용하는 누적 가입자(홈페이지·앱)는 올해 8월 말 기준 133만명이다. 지난해 연결기준 정육각의 매출액은 2006억원이다.

동네 구멍가게 같던 정육각은 어떻게 돼지고기 도축부터 고객에게 4일 안에 배송되는 시스템을 갖췄을까. 스타트업이 대기업 계열사였던 초록마을을 인수한 배경은 뭘까.

이번 ‘남돈남산’은 정육각을 창업하고 키운 김재연 정육각 대표(33)의 이야기이다.

일반인이 제품 배송하는 ‘정육각 런즈’로 당일·새벽배송 확대
“미국으로 유학 가기 전 우연한 기회에 도축한 지 얼마 안 된 돼지고기를 먹게 됐어요. 돼지고기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받았죠. 갓 도축한 돼지고기가 가장 맛있지만, 일반 소비자들이 이런 고기를 먹는 건 거의 불가능하죠. 돼지고기 도축부터 배송까지 최대 4일 걸리는 시스템을 만들어보기로 결심했죠.”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실제로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도축장에 직접 가서 고기를 구입해야 했지만 대량 구입할 돈도, 고기를 썰 직원을 구할 돈도, 고기를 판매할 유통망을 구축할 돈도 없었다. 친구랑 모은 돈 500만원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했다.

“500만원 중 150만원을 돼지고기 구입에 썼던 것 같아요. 하루 12시간씩 고기를 썰었어요. 직접 배달도 했어요. 고기 써는 방법을 전문적으로 배운 것은 아닙니다. 정육점 등에서 고기 써는 모습, 인터넷에 올라온 동영상 등을 참고하면서 익혔어요. 처음에는 온라인 카페, 제가 살고 있던 지역 카페 등에 고기를 올려서 팔았어요. 그런데 반응이 처음부터 아주 좋아서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창업 후 1년까지 매일 고기를 썰었어요.”

김 대표는 축산업자에게 앞으로 회사가 잘 돼서 대량 구입할 수 있으니 신선한 돼지고기를 공급해달라고 설득했다. 그의 젊은 패기와 도전정신, 정성과 노력은 축산업자의 마음을 움직였고, 정육각은 갓 도축된 신선한 돼지고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이후 정육각은 VC로부터 초기 투자를 받아 2016년 11월 대전에 공장을 마련했다.

정육각은 고객 주문부터 돼지고기 도축, 그리고 배송까지 4일 안에 이 모든 것이 이뤄지는 시스템을 완벽히 구축하기 위해 2020년 9월 ‘정육각 런즈’를 출범했다. ‘정육각 런즈’는 보통 사람들이 일정한 돈을 받고 고객에게 정육각 제품을 배송해주는 정책이다.

정육각 제품을 배달하는 사람(러너)은 제품 1팩을 배송할 때 1팩당 보통 2000원대의 돈을 받는다. ‘정육각 런즈’는 동시에 두 가지 일이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 즉 ‘투잡러’에게 인기가 좋다. 정육각은 4일 안에 이뤄지는 배송시스템을 넘어 일부 제품을 당일배송, 새벽배송하느 시스템도 구축했다. 한 달에 보통 150~200명의 ‘정육각 러너’가 활동한다.

‘정육각’이 판매하는 고기가 불판에서 구워지고 있다. <정육각>
회사가 급성장하면서 어느 순간 성남 공장은 포화상태가 됐다. 추가로 공장을 마련해야만 했다. 경기도 김포시에 새로운 공장을 짓고, 2021년 3월부터 이곳에서 돼지고기 등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기존 성남 공장을 정리했으며, 신선한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주말에도 김포 공장을 가동한다. 환경 보호 등을 고려해 돼지고기 같은 냉장 제품을 배송할 때 드라이아이스 대신 얼음을 사용한다. 정육각은 해산물도 판매한다.

“정육각은 신선한 돼지고기 판매가 핵심 사업이기 때문에 공장에 재고(돼지고기 등)가 거의 없습니다. 일반 공장들과 달리 원재료, 완제품 등을 보관할 창고가 필요 없죠. 대부분의 공장 공간을 작업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론상 1년에 1조원 규모로 돼지고기 등 제품 생산이 가능합니다.”

대상그룹의 유기농 식품 판매점 ‘초록마을’ 800억원대에 인수
기업은 생물이기 때문에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하면 생존에 위협을 받을 수 있다. 기업 설립 후 3~7년 차에 겪게 되는 위기를 의미하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라는 용어까지 생겨날 만큼 3년 이상 존속하는 게 정말 어렵다.

김 대표도 정육각을 경영하면서 새로운 성장 동력 마련을 위해 고심했고, ‘초록마을’을 인수해 다시 한 번 도약하기로 결심했다. 대상그룹이 갖고 있던 유기농 식품 판매점 ‘초록마을’을 2022년 4월 인수한 배경이다.

유기농 식품 판매점 ‘초록마을’ 내부 모습. <정육각>
초록마을은 유기농, 친환경 식품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곳으로, 가맹 사업도 한다. 1999년 설립돼 다양한 유기농, 친환경 식품을 발굴·판매하거나 다른 기업들과 제품을 공동 개발하는 노하우를 갖고 있다. 하지만 초록마을은 오랜 기간 적자를 내며 대상그룹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김 대표는 정육각을 통해 신선 식품, 초록마을을 통해 유기농 식품을 판매하면 프리미엄 식품 시장에서 선두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초록마을을 분석해보니 강점이 많지만, 온라인 판매와 물류시스템이 상대적으로 취약했습니다. 대부분의 매출액이 오프라인 매장에서 창출됐고, 비효율적인 물류시스템을 갖고 있더라고요. 정육각이 이를 개선하고, 초록마을에 정육각의 제품도 판매하면 시너지가 날 수 있겠더라고요. 하지만 인수 후 유동성 위기에 직면해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정육각은 초록마을 인수 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막판에 핵심 투자자와의 딜이 무산됐다. 초록마을 인수 작업이 한창이던 2022년 2~3월만 해도 스타트업·벤처업계에 소위 돈이 잘 돌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김 대표는 단기 차입 대출을 이용해 인수 자금으로 썼다. 하지만 이 방법이 기업 경영에 발목을 잡았다. 금리 인상으로 금융환경이 갑자기 바뀌었고, 스타트업 투자에 적극적이던 VC, 기관투자가 등이 투자를 보류하면서 스타트업·벤처업계 투자 생태계가 급격히 얼어붙었다.

정육각은 초록마을 인수할 때 빌린 돈에 대한 이자 비용 등 고정비가 증가하면서 유동성 위기를 겪었다. 허리띠를 졸라맸고, 구조조정을 해야만 했다.

“한동안 정말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이제는 인수 후 통합(PMI) 작업이 끝났고, 물류시스템 등 비효율적인 부분도 개선했어요. 올해 초록마을은 흑자로 돌아설 예정입니다.”

올해 8월 기준 초록마을의 매장 수는 총 340개(직영점 80개, 가맹점 260개)이다. 김 대표는 올해 초록마을과 정육각이 협업한 새로운 형태의 매장 출점을 준비 중이다. 초록마을이 지난해 출시한 영유아식 브랜드 ‘초록베베’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면서 초록베베 등 초록마을 제품 수출도 추진 중이다.

김 대표가 꿈꾸는 정육각은 프리미엄 식품 시장에서 우리나라 최고가 되는 것이다.

“프리미엄 식품이 소비자들에게 사랑받고 꾸준히 성장하기 위해 특히 중요한 것은 맛, 안전 등 2가지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정육각은 신선 식품 개발·판매로 맛, 초록마을은 안전 지향을 추구할 거예요. 즉 맛, 안전을 다 확보할 겁니다. 한국 음식이 ‘K푸드’라는 이름으로 미국 등 여러 국가에서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데, 정육각과 초록마을의 음식으로 세계 여러 곳곳에 맛있고 안전한 음식을 제공하겠습니다.”

신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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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프로필

증권부, 부동산부, 사회부 등을 거쳤으며, 중소중견기업, 중견그룹, 벤처, 스타트업, 화제의 인물, 연예인 등 여러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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