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대한민국 있게 한 이름들... 더 늦기 전에 은혜를 갚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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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8.31. 오후 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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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한정윤 리멤버투게더7697 회장 인터뷰

리멤버투게더7697 한정윤 회장이 전쟁기념관에서 미군 전사자 명비를 쓰다듬고 있다.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 대부분은 6·25 때 알게 모르게 미군의 은혜를 받았어요. 그들을 기억하고 위로하는 활동에 참여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6·25가 터진 그해 겨울에 어머니는 만삭이었다. 1950년 12월 초 황해도 사리원. 38선 이남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퇴각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까지는 전쟁을 마치고 새해를 집에서 맞으리라던 예상은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완전히 빗나갔다.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북한 주민이 많았지만, 만삭 어머니는 어떻게 피란할지 막막했을 것이다.

“그때 손을 내밀어준 미군 병사들이 있었어요. 해주역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군용열차에 태워주면서 시레이션(C-ration·미군 전투식량)까지 건넸다고 합니다. 두 분은 무사히 조치원역에 내렸고, 어느 할머니가 방을 내주며 거둬주셨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12월 21일, 제가 태어났습니다(웃음).”

지난 19일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만난 한정윤(74)씨는 ‘1950년 전쟁둥이’의 사연부터 들려줬다. 명함에는 ‘리멤버투게더7697′ 회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리멤버투게더(remember together)는 ‘함께 기억하자’는 뜻. 7697은 이 단체를 만든 2018년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실종된 6·25 참전 미군 병사 숫자라고 했다. 최근 미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지난 6년 사이에 232명의 유해가 가족 품에 안겼다. 7465명은 여전히 실종 상태다.

한정윤씨가 미군 실종자 가족에게 보내는 ‘우정의 액자’를 보여주고 있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


한정윤 회장은 전쟁기념관 유엔 참전국 전사자 명비 앞에서 “리멤버투게더7697은 70년이 넘도록 남편이나 아들, 형제를 기다리며 슬픔에 잠겨 있는 미군 실종자 가족을 위로해주기 위해 만든 단체”라며 “전쟁 통에 무사히 태어난 저로서는 어머니를 도와준 미군들에게 은혜를 갚고 싶다”고 했다.

-주로 어떤 일을 하시나요.

“6·25 때 낯선 땅에서 우리의 자유를 지켜주다 실종된 미군들을 기리는 행사와 캠페인을 주기적으로 열고, 그 가족들에게 ‘한국은 결코 잊지 않는다(Korea never forgets)’는 마음을 전해 왔습니다. 지난 5월에 한국전쟁미군포로실종자가족연합후원회라는 비영리 민간 단체로 등록했어요. 전쟁둥이 몇 명이 주축이 돼 이 문제를 알리고, 미군 실종자 가족에게 ‘우정의 액자’를 보내고 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도널드 트럼프와 김정은의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직후였어요. 2018년 7월에 박스 55개에 담긴 미군 유해가 송환되는 것을 TV로 보고 이튿날 동두천 미군 부대(캠프 케이시)를 찾아갔습니다. 군목을 만나 ‘혹시 그 유해 속에 내 어머니를 도와준 미군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미군들과 함께 기도하고 싶다’고 했지요.”

공군 오산기지에 착륙한 미 수송기 C-17에서 유엔기로 감싼 미군 유해 55구를 향해 경례하고 있다. 이날 미 수송기는 북한 원산 갈마비행장에서 6·25 도중 북한에서 숨진 미군 유해 55구를 실은 뒤 오산 기지로 돌아왔다. /AFP연합뉴스

-군목은 뭐라고 답했나요.

“카투사가 통역했는데 ‘군 선배들을 기억하는 좋은 모임이 될 수 있다’며 반겼습니다. 그렇게 리멤버투게더7697이 탄생했어요. 며칠 뒤 그 군목이 저를 소개하며 설교했고, 미군 병사들이 저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날 그 박수 소리가 어떻게 들렸나요.

“왜 이제야 왔느냐는 질책 같았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피 흘리며 청춘을 바쳤는데, 우리가 응당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지요.”

-북한은 2018년 약속한 ‘싱가포르 유해 발굴 합의’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데.

“그 문제는 아군·적군 가리지 않고 부상병을 치료하는 적십자 정신으로 다뤄야 합니다. 김대중 정부 때 인도적 지원을 명분으로 북한에 막대한 금액을 건네면서 왜 실종 미군 찾기에 대해선 말 한마디 없었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한미 동맹을 위해서라도 요구해야 합니다.”

지난 5월 3일 전쟁기념관에서 한정윤 리멤버투게더7697 회장이 국군의장대, 한국교회연합(회장 송태섭 목사), 시민들이 함께 실종 미군을 잊지말자는 'Korea Never Forgets!' 행사를 하고 있다. /한정윤 제공

-느리지만 실종 미군 숫자가 줄어들 때 기분이라면.

“사실 한 달에 서너 명밖에 못 찾고 있어요. 이미 고령인 미국 가족들에겐 실망을 안겨줍니다. 실종 미군에 대한 정책이나 우리 국민의 노력은 그들의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전환돼야 해요.”

-어떻게요?

“실종 미군의 유해를 발굴하기 어려운 현실이라면 우리가 그들을 잊지 않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액자를 꺼내 보여주며) 경첩처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우정의 액자예요. 왼쪽에는 성조기를 배경으로 참전 당시 미군 사진을, 오른쪽에는 ‘대한민국은 영웅과 그의 가족을 잊지 않겠다’는 문구를 넣어 선물하고 있어요. 집에 진열해 후손까지 볼 수 있습니다. (비용을 묻자) 제작부터 포장·발송까지 25만원이 듭니다.”

-개인이 하기엔 어려움이 많을 것 같은데.

“저한테는 전천후 특공대가 셋 있어요. 첫째는 메시지를 미국까지 전하고 답장을 받아오는 인터넷, 둘째는 영상 통화가 가능한 휴대전화, 그리고 셋째는 독립군과도 같은 이 일을 격려하며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고 돈까지 주는 착한 어떤 아주머니(아내 박순자씨). 그런데 6년을 하다 보니 곳간이 비어갑니다. 제 왼쪽 눈은 거의 실명 상태고요.”

-그런데 왜 계속하십니까.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 대부분은 6·25 때 알게 모르게 미군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실종 미군 가족들의 슬픈 표정을 마주하면, 제가 부족해도 이 일을 놓을 수가 없어요. 나라와 국민이 하나로 뭉쳐 동방예의지국다운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보람이 될 테고요.”

한정윤씨가 국내 특허를 가지고 있는 '감성적 국기 게양대'

9월 20일에 그들을 호명한다


육군 1사단에서 복무했다는 그는 1975년부터 홍보 기획사 ‘월드기획’을 운영했다. 올림픽대로, 자유로 등 자동차전용도로에 응급 통신망을 깔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했다. 한 회장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국기가 잘 펼쳐지는 ‘감성적 국기 게양대’ 국내 특허도 가지고 있다. 은퇴 후 리멤버투게더7697을 만들었다.

-지난 6년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면.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을 국빈 방문한 때였어요. 만찬장에서 실종 미군의 귀환을 염원하는 촛불을 켰는데 갑자기 촛불이 흔들리는 거예요. 대통령은 순간적으로 손바닥을 펴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보호하셨습니다. 그 장면이 인상적이라 미군실종가족연합 리처드 다운스 총재에게 사진을 보냈지요.”

-그가 뭐라고 하던가요.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Very nice(아주 좋다)’라고 했지요. 대통령실에 건의해 실종 미군 가족들에게 선물하는 우정의 액자에 그 사진을 사용할 수 있다는 허락도 받았습니다.”

-우리 정부는 그동안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윤석열 대통령은 ‘참전 미군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 말했고, 보훈부 장관도 ‘보훈은 나라의 사활이 걸린 가치’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예산이 없다는 거예요. 적국인 북한에 준 돈,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돈은 어디서 나왔나요? 미군은 6·25 발발 일주일 만에 한국을 구하러 왔습니다. 한미 동맹이 어떤 것인지 행동으로 보여줘야 해요. 6·25 참전 가족들을 우리 편으로 만든다면 방위비 분담 문제 풀기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안부를 묻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되나요?

“물론입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는 마음을 전하는 방법이 우정의 액자입니다. 하와이에 있는 미 국방부 전쟁 포로 및 실종자 확인 기관(DPAA)에서 군인의 유해를 발굴하고 감식해 가족에게 돌려보낼 때는 장지까지 태극기가 따라가면 더 좋고요. ‘당신의 희생 덕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알려줘야 합니다. 우등생보다는 모범생이 돼야죠.”

-우등생보다 모범생이 돼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대한민국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등한 나라가 됐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으니 모범 국가는 아닙니다. 근년에 ‘순살 아파트’ 사건이 있었잖아요? 철근을 제대로 넣지 않은 건물처럼 한미 관계가 무너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죽어가는 우리나라를 구해줬는데 마음을 전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요?”

한정윤 리멤버투게더7697 회장은 가끔 전쟁기념관을 찾아가 실종 미군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기도한다. 이날은 마침 미국에서 온 한국전 참전용사 가족이 있어 국군의장대의 협조로 사열을 받도록 했다. /한정윤 제공

-제3회 ‘미군 한국전쟁 포로·실종자 인식의 날’ 행사는 언제 어디서 열리나요.

“오는 9월 20일 전쟁기념관에서 할 계획입니다. 제 욕심이지만 윤 대통령 부부가 오셔서 실종 미군의 귀환을 염원하는 촛불을 밝혀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행사에 참여한 국민들이 7465명의 이름을 차례로 부를 텐데, 명단 일부를 대통령께서 호명하신다면 미국 사회 파장이 엄청날 겁니다. 장차 예산이 마련되면 미국의 가족 대표들도 초청해야죠.”

-정치권과 국민에게 바라는 점이라면.

“2006년 대한민국 국기법 제정 국회 토론회 때 제가 국민 대표로 발표하고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국회에서 100% 찬성으로 통과됐어요. 6·25 참전 중 포로가 되거나 실종된 병사와 가족에 대한 예우법도 만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국민들께는 그들을 기억하고 위로하는 인도적 활동에 참여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전쟁기념관에 올 때마다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이곳은 6·25 참전 병사들을 추모하는 장소입니다. 이왕이면 9월 20일에 미군 포로·실종자를 상징하는 POW/MIA 깃발을 성조기 아래 게양하면 더 뜻깊은 추모가 될 것 같아요. 정부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동참하고 이어 달렸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제 인생의 이정표는 이 다섯 글자가 전부입니다. 은혜를 갚자.”

리처드 클라크, 데이비드 클리어, 버나드 클로제, 레슬리 코버, 폴 콜린스.... 그의 등 뒤로 참전국 전사자들 이름이 벽 전체를 아득하게 채우고 있었다. 돌에 새긴 글자가 보였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국민을 지키라는 부름에 응했던 그 아들·딸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전쟁기념관 6·25 유엔 참전국 전사자 명비.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국민을 지키라는 부름에 응했던 그 아들·딸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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