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여성은 잠재적 (성폭력) 피해자니 밤늦게 다니지 말고 낯선 사람을 피하라’고 교육받았다. 이제 (피해야 할) 위험한 사람은 나를 몰래 따라오는 낯선 사람이 아닌 내 주변 모든 지인이 됐다.”
20대 여성 이유진씨는 30일 저녁 7시께 서울지하철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지인 사진을 도용해 성적으로 모욕하는 범죄가 확산되고 (이런 가해 행위가) 온라인 공간의 ‘놀이 문화’가 된” 참담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이 될 때까지 국가는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며 여성가족부 폐지를 도모한 것 말고 무얼 했냐”고 비판했다.
서울여성회 등 단체 20여곳과 개인 50여명(30일 기준)의 연대체인 ‘딥페이크 성범죄 아웃(OUT) 공동행동’은 이날 강남역 10번 출구 앞 인도에서 ‘#딥페이크 성범죄 아웃(OUT) 말하기 대회’를 열었다. 이씨를 비롯해 이 자리에 함께한 여성 약 50명은 텔레그램 등에서 ‘지인’을 특정해 만든 불법합성물을 유포하고 피해자를 괴롭히는 성범죄가 만연한 상황에 대해 함께 분노하고,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나눴다.
주최 쪽이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말하기’를 선택한 건, 연대의 힘을 통해 성차별 구조와 성폭력 문화에 대해 변화를 촉구해 온 공간이기 때문이다. 박지아 서울여성회 성평등교육센터장은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한 여성의 죽음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이곳에서 많은 이들이 함께 모여 분노하고 변화의 힘을 만든 곳이 바로 강남역 10번 출구”라며 “여성의 분노는 언제나 길을 만들어 왔다. (딥페이크 성범죄가) 언제부터 시작돼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도대체 왜 해결되지 않는지 여성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변화의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행사 참가자들은 국가의 미진한 대응 탓에 심각한 피해를 유발하는 디지털성범죄가 반복된다고 보았다. 40대 여성 이경희씨는 “불법촬영을 가벼운 문제로 치부할 때부터, ‘엔(N)번방’ 사건 가해자들이 줄줄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을 때부터, 딥페이크 성범죄를 (경찰에) 신고해도 ‘국외에 서버가 있어 못 잡는다’고 할 때부터 지금과 같은 사태를 예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30대 여성 윤아무개씨는 “지역·학교별 불법합성물 공유방이 만연하다는 언론 보도를 접한 날 화가 나서 한숨도 자지 못하고 출근했다”며 “한국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국외에 알리려고 남성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을 영어로 번역해 엑스(X) 계정에 올리고, 언론에 제보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정부와 수사기관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한 게 아니라 나 같은 여성 누리꾼들이 문제를 수면 위로 띄운 뒤에야 대응에 나섰다는 점이 특히 화가 난다”고 했다.
여성들의 발언에 이어, 성착취 문화를 용인해 온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 몸짓도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온라인의 익명성 뒤에 숨은 가해자를 찾아내겠다”는 의미로, 쓰고 있던 흰 가면을 일제히 벗어 높이 들어 올리며 “너희는 우리를 능욕할 수 없다”, “지워야 할 것은 여성이 아니다”, “익명 뒤에 숨어 있는 딥페이크 성범죄자 아웃”, “여성을 모욕하는 사회를 갈아엎자” 같은 구호를 외쳤다. ‘성차별 문화’, ‘2차 가해 댓글’, ‘책임 회피 국가’ 등 문구를 적은 손팻말을 ‘해방의 쓰레기통’에 넣어 불태우는 퍼포먼스도 이어졌다.
주최 쪽은 내달 6일 저녁 7시 서울 종로구 보신각 인근에서 디지털성범죄 근절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 예정이다. 그 뒤 13일부터 27일까지 매주 금요일 저녁 7시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딥페이크 성범죄 아웃(OUT) 말하기 대회’를 이어갈 예정이다.
정인선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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