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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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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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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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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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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월 17일(음력 1월 6일, 신축(辛丑)일), 후한, 크게 사면을 내렸다.[1]
  • 3월 25일(음력 2월 12일, 정축(丁丑)일), 동탁이 스스로 태사(太師)가 되었다.[2]
  • 음력 2월 - 후한, 원소 · 원술 등이 이끄는 반동탁 연합군손견 군과 동탁이 이끄는 중앙 정부군이 사례 하남윤 양현의 양인(陽人) 땅에서 충돌하여, 손견이 승리하였다.[3] (양인 전투) 동탁은 낙양의 여러 황제의 능을 발굴하게 하였다.[4]
  • 음력 4월, 동탁이 장안(長安)에 들어왔다.[5]
  • 8월 1일(음력 6월 23일 병술(丙戌)일), 후한에서 지진이 있었다.[6]
  • 음력 7월, 사공 종불(種拂)이 면직되고, 광록대부 제남(濟南) 사람 순우가(淳于嘉)가 사공이 되었다. 태위(太尉) 조겸(趙謙)이 파직되고, 태상(太常) 마일제(馬日磾)가 태위가 되었다.[7]
  • 11월 5일(음력 10월 1일 임술(壬戌)일), 동탁이 위위(衛尉) 장온(張溫)을 죽였다.[8]
  • 음력 11월, 청주(青州)의 황건적태산(太山)에 쳐들어갔으나, 태산태수 응소(應劭)가 이를 격파하였다. 황건적은 방향을 바꾸어 발해(勃海)에 쳐들어갔고, 공손찬(公孫瓚)이 황건적과 더불어 동광(東光)에서 싸워, 다시 이를 대파하였다. 이때, 장사(長沙)에는 죽었다가 달[月]을 지나 부활한 사람이 있었다.[9]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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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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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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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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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후한서》 〈제9권〉 “二年春正月辛丑,大赦天下。”
  2. 후한서》 〈제9권〉 “二年[...]二月丁丑,董卓自為太師。”
  3. 후한서》 〈제9권〉 “二年[...] 二月 [...] 袁術遣將孫堅與董卓將胡軫戰於陽人,軫軍大敗。”
  4. 후한서》 〈제9권〉 “二年[...] 二月 [...]董卓遂發掘洛陽諸帝陵。”
  5. 후한서》 〈제9권〉 “二年[...]夏四月,董卓入長安。”
  6. 후한서》 〈제9권〉 “二年[...]六月丙戌,地震。”
  7. 후한서》 〈제9권〉 “二年[...]秋七月,司空種拂免,光祿大夫濟南淳于嘉為司空。太尉趙謙罷,太常馬日磾為太尉。”
  8. 후한서》 〈제9권〉 “二年[...]冬十月壬戌,董卓殺衛尉張溫。”
  9. 후한서》 〈제9권〉 “二年[...]十一月,青州黃巾寇太山,太山太守應劭擊破之。黃巾轉寇勃海,公孫瓚與戰於東光,復大破之。是歲,長沙有人死經月復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