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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안:신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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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철

신광철작가는 충북 진천 생으로 1957년 1월 24일 출생했다. 주민등록상으로는 1959년으로 되어 있다. 신광철 작가의 생년월일이 잘못 된 것은 태어난 고향인 충북 진천군 백곡면 용덕리에 있다. 출생지와 초등학교와의 관계에 있다. 산골의 오지라고 할 만큼 깊은 곳에 마을이 있었다. 작가의 아버지가 아들의 나이를 의도적으로 줄인 것에 있었다. 당시는 가능했다고 한다. 학교가 멀어 어린 나이에 다니기 힘들다고 해서 여동생과 함께 1년씩 호적나이를 줄였다. 담당자가 잘못 듣고 2살씩 줄였다. 그것이 지금의 나이가 되었다.

6살에 부모가 서울로 이사를 하면서 서울살이가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수도권에서 살고 있다. 부모 산소가 고향에 있다. 첫 서울의 기착지는 영등포구 양남동이었다. 서울 당중초등학교, 당산중학교, 동북고등학교를 거쳐 늦게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했다.

신광철 작가의 문학 인생은 시인으로 출발했다. 시집 <늑대의 사랑>의 시평은 나태주 시인이 썼다. 나태주 시인과의 인연은 나태주 시인이 현대불교문학상을 수상한 것과 인연이 있었다. 신광철 작가는 당시 불교문학포교원에서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혜관스님 수완스님 로담(정안)스님 등과 현대불교문인협회를 만들고 <불교문예>가 태동되는 시기였다. 신광철 작가는 <불교문예신인상>의 전신이었던 삼오문학상을 받으며 글을 시작했고, 불교문학포교원과 인연을 맺으면서 문학활동이 시작되었다. 나태주 시인이 2회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고, <불교문예>의 주간을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아는 관계로 발전했다.

신광철 작가의 저서를 살펴보면 다층(多層)적인 면을 알 수 있다. 퇴적암처럼 중층(中層)구조를 가지고 있다. 문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전반을 아우르고 있는 폭 넓은 지적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첫 출발지인 문학으로는 시집이었다. <늑대의 사랑>과 <사람, 그래도 아름다운 이름> <삶아, 난 너를 사랑한다>가 있다. 동시에 3권의 시집을 낸 적도 있다. 문단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경우다. <하늘웃음> <사랑은 시다> <사는 것도 중독되는 거야> 3권을 동시에 출간했다. 신광철 작가의 책을 다수 낸 '공감의 기쁨' 대표가 출판사 문을 닫으면서 3권의 시집을 동시 출판했다. 출판사 폐쇄 기념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1권이 아닌 3권의 시집이 동시 출간된 드문 사연이다. 시 평론집으로는 <시에서 길을 찾다>가 있다.

보고 싶은 마음을 / 종이에 그리면 / 그림이 되고 / 마음에 그리면 / 그리움이 되고 / <그리움>

장편소설 <강궁 이옥(李沃)>, 대하소설로 <소설환단고기> 5권을 저술했고 어른이 읽는 동화 <꼬마철학자 두발로>가 있다. 리더십을 다룬 책으로 <칭기스칸 리더십> <장보고 리더십>이 있으며, 신광철 작가의 인생을 바탕으로 해서 사람의 몸에 관한 사유와 성찰을 다룬 <인문형 인간>이 있다. 사람들의 몸이 가진 특성에서 인간본성과 깨달음을 적은 역작이다. 예를 들면 사람의 걷는 모습을 보면 한 발이 앞으로 나가면 다른 발은 뒤에 남는다. 두 발이 엇갈리면 앞으로 전진한다. 손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걷는 모습을 보면 한 손이 앞으로 나가면 한 손은 뒤로 간다. 엇갈리며 전진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로 엇갈리며 만들어진다. 웃음과 눈물, 사랑과 이별,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며 엮어진다. 웃음이 정상이라면 눈물도 정상이다. 행복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면 불행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가지만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고난이 왔을 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방법과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긍정이와 웃음이의 마음공부 여행>은 어린 두 소년인 '긍정이'와 '웃음이'가 세상을 여행하며 인생을 배워가는 365+1개의 이야기다. 2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은 <꿈은 이루어서 자신에게 선물하는 거야>, 2편은 <인연은 사람을 선물 받는 거야>다. 한 편 한 편이 명문이다. "코끼리만한 생각보다 개미의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꾸는 거야", "두 어깨에 진 짐이 살아가는 힘이야". "모든 아침은 어둠을 지나왔어". "꽃은 한 계절에 피지만 꽃을 피우려면 사계절이 필요해." 같은 깨달음의 언어들이 겹겹이 쌓여있어 읽는 묘미를 자극한다. 신광철 작가는 긍정의 작가, 웃음의 작가다. 독자를 행복이로 만들어 주는 작가다.

신광철 작가의 저술이 중충이라고 하는 것은 문학으로 시 소설 수필과 시 평론집을 저술한 것 외에도 인문학 전반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다.

놀라운 것은 문인으로 활동을 하면서 한옥책을 5권 냈다. <한옥마을> <소형한옥> <한옥설계집> <한옥의 멋> 그리고 아이들이 읽는 <한옥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 한국문화를 다룬 <옛길을 걷다>와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세계기록유산>이 있다. 신광철 작가는 어려서부터 한국문화와 문화유산 그리고 한국인에 대한 관심이 특별했다고 한다.

신광철 작가의 한국문화에 대한 사랑은 깊다. 그리고 넓다. 한국인의 문화 전반을 다룬 책이 <극단의 한국인, 극단의 창조성>이다. 한국인의 정신과 문화 그리고 변별성에 대한 담론을 철학적이며 인문학적으로 풀어냈다. 한국인은 왜 빨리빨리를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하고 평생하는가. 그리고 왜 호기심과 도전정신이 강한가를 설명한다. 한국인은 서두름의 냄비근성과 지속하는 뚝배기 기질을 갖고 있다고 한다. 또한. 한국인의 정서로 슬픔의 한과 기쁨의 흥 문화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가를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서로 상반된 냄비와 뚝배기, 한과 흥 같은 양 극단을 소유한 민족이라고 설파한다. 결국 양극단을 안다는 것은 세상 전체를 이해한다는 결론에 도달 한다. 한국인은 양 극단을 이해하는 존재여서 양 극단의 기질과 정신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단초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한국인만이 가진 변별성이 곧 한국인의 특성이라고 한다. 세계에서 나물문화를 가진 민족이나 나라는 없다고 한다. 나물은 순화된 채소나 야채가 아니라 야생으로 들이나 산 그리고 물에서 나는 식물을 채취해서 일상적으로 밥상에 올리는 것을 말한다. 나물을 전 국민이 일상적으로 채취해서 먹는 나라는 없다. 중국과 일본도 하지 못한다. 중국은 만주 지방에 있는 조선족들만 한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이다

나물을 먹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워서다. 식물에 들어있는 성분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물을 먹기 위해서는 몇 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호기심과 도전정신이다. 풀과 나무가 가진 성분에 대해 궁금해 하고, 먹어봐야 알 수 있다. 그리고 정보가 축적되어야 한다. 삼박자가 있어야 가능한데 호기심-도전정신-문화축적이다. 한국인은 이러한 요소를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다. 곧 한국인의 나물문화는 한국인의 툭성 중 하나이며 한국인의 일반적 특성이다. 한국인의 문제해결능력과 창조능력이 여기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한류의 출발도 여기에서 찾는다. 당연히 평생을 '빨리빨리' 할 수 있는 능력과 기질도 여기에서 찾는다.

또한 중국고전으로 논어를 번역한 <논어,이것을 알지 못하면>과 <완벽에 가까운 개인주의자, 노자> <공자와 12제자>가 있다.

신광철 작가는 모임과 협회 활동을 하지 않고 저술작업과 강의 활동만 하고 있다. 사회성으로는 은둔자이면서 개인적으로는 개방적인 여행가다. 신광철 작가는 말한다. 게으름을 천성으로 타고 났으나 여행과 글 쓸 때만 눈이 반짝인다고. 은둔과 여행은 신광철 작가의 하나면서 두 개의 얼굴이다.

<학력 및 이력>

동북고등학교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 졸업

한국학연구소 소장


<저서>

2023년  : 소설 환단고기 1.2.3.4.5권

2023년  : 꼬마철학자 두발로

2021년  : 다산에게 배우다

2021년  : 서애 류성룡

2020년  : 긍정이와 웃음이 마음공부 여행 1.2권

2020년  :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2020년  :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2019년  : 강궁 이옥

2018년  : 아름다운 우리한옥

2018년  : 사랑은 시다

2018년  : 하늘웃음

2017년  : 인문형 인간

2013년  : 극단의 한국인 극단의 창조성

2013년  : 인생지도

2012년  : 한옥의 멋

2010년  : 한옥 마을

2010년  : 장보고 리더십

2010년  : 칭기즈칸 리더십

2010년  : 옛길을 걷다

2006년  : 삶아 난 너를 사랑한다

2002년  : 땅의 아들

2002년  :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



<신광철 작가의 시집 <늑대의 사랑>에 대한 나태주 시인의 시평을 소개 한다.>

명산이 있는 시의 풍경 -신광철 시집 <늑대의 사랑>에 부쳐 나태주(시인)

1. 지구여행에서 만난 사람

나는 이 세상이 참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지구라는 별을 만난 것이 우선 축복이고 사람인 것이 행운이고 한국말을 쓰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 세상에 와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내게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차라리 우리는 한 삶 한 삶씩 독립적으로 우주공간을 흐르고 있는 별이 아닐까? 때로는 외로워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기뻐하기도 할 줄 아는 별, 그래서 우리는 희미하지만 매우 아름답게 반짝이는 조그만 별들이 아닐는지?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와서 만나는 모든 사물들이며 인간들은 나에게 더없이 소중한 선물들이다. 나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 좋은 선물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서 나는 이 세상에서 삶을 내가 알지 못할 머나먼 별에서 지구라는 초록별로 떠나온 나들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하루하루를 좋은 여행이라고 생각해보곤 한다.

이번 여행에서 풀과 나무와 숲과 살아있는 생명들을 보았지요. 쉽지만은 않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소중한 경험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람은 사랑에 의해 비로소 웃자라는 나무였습니다. 지구여행 티켓은 행운의 여행권입니다.

-<지구 여행> 끝 연

어쩌면 이리도 내 생각이나 느낌과 같을까? 새로이 낼 시집 뒤에 들어갈 글을 좀 써달라며 보내온 신광철 시인의 시집 원고를 읽으면서 나는 내 마음 속 한 자락 꿈을 들켜버린 양 화들짝 놀라고야 말았다.

모름지기 맹수는 맹수를 알아보게 되어있고, 가재는 가재를 쉬이 알아보는 법이다. 마음속에 비밀을 숨긴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가슴 속 비밀까지도 눈치로 알아차리게 되어있고, 외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내면에서 숨쉬고 있는 외로움의 냄새를 맡게 마련인가 보다.

내가 신광철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꽤나 오랜 세월이지 싶다. 그것은 1997년인가 4월,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부처님 오신날 봉축시 낭송회 자리에서였다. 그 때 마침 나는 현대불교문인협회가 주관하는 제2회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자로 참석하고 있었고 신광철 시인은 행사의 2부 사회자로 수고하고 있었다. 그의 첫인상은 얼굴 모습은 젊어 뵈는데 말씨며 행동이 노숙해서 나이가 도통 가늠이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뒤로 우리는 이런저런 일로 만나는 기회를 자주 가졌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스쳐 지나갈 뿐인 가벼운 만남이었다. 우리가 보다 가까이 서로를 알게 된 것은 2000년 가을, 내가 계간 <불교문예> 편집 주간을 맡으면서부터다.

우리는 그때 스님들 몇 분을 모시고 파주의 한 콘도를 빌려 하루 밤을 지새면서 길고 긴 수련회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그는 역시 사회자의 역할을 맡으면서 행사를 꾸려나갔다. 모임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신광철 시인은 날더러 '참 말을 맛있게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내용의 말을 해주었다. 나는 그의 말이 그냥 듣기 좋으라고 흘리는 말인지 아니면 칭찬인지 몰라서 어리벙벙한 채 듣고만 있었다. 지내오면서 보아하니 그는 모든 일에 급할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성격이 무척 느긋하고 둥글 뿐더러 깊은 속내를 함부로 꺼내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 때도 서두는 일이 없이 조근조근 순서를 밟아서 했다. '참 말을 맛있게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표현이야말로 그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사람은 제 속에 들어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서 발견하게 마련인 모양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와 생각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가끔 만난다는 것은 그곳 자체로써 하나의 행운이요, 축복이 될 수 있는 일이다. 나에게 있어 신광철이란 젊은 시인이 바로 그렇다.

2. 당연한 아웃사이더

실상, 신광철은 한국 현대시단의 주류에 서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힘이 있어 보이는 문학 잡지나 출판사와도 매치 되어있지 않고 문단권력으로 대변되는 평론가 그룹과도 잘 어울리는 처지가 아닌 듯 싶다. (그러기에 나 같은 시골 서생書生에게까지 시집 해설문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기사 그는 그런 잡다한 것들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는 사람같이도 비쳐진다. 그러면서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만 열중하고 틈틈이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열심히 써나가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또 글의 형식에 대해서도 그다지 구애를 받지 않는 사람같이 보인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시 형식뿐만 아니라 소설 형식, 수필 형식까지 기꺼이 빌려 글을 쓰는 사람이 그이다. 그만큼 그는 자유자재한 인간으로 보인다. 어쩌면 시단의 주류란 것 자체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서울의 몇몇 잡지사에 옹기종기 모여든 소수의 시인들의 자기 체면에서 나온 특권의식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 땅의 좋은 시인은 중앙의 시단이나 그 흐름에서 멀리 벗어나 자기만의 시를 썼던 사람들이다.

일찍이 김소월金素月이 그러했고 백석白石이나 윤동주尹東柱가 그러했고 이륙사李陸史나 신석정辛夕汀이 그러했으며 최근에 이르러 박용래朴龍來나 이성선李聖善 또한 중앙시단과는 무관하게 떠돌이별처럼 홀로 외롭게 존재하며 시를 썼던 시인들이다. 그들이야말로 문단 외곽지대에서 철저히 아웃사이더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웃사이더야말로 진정한 시인의 모습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시인은 어떤 단체에 종속되거나 어떤 흐름에 휩싸이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되면 이미 생명력을 잃고 마는 존재들이다.

시인은 그 자신 스스로 존재하므로 의미를 갖는 목적적인 존재인 것이다. 아무래도 시인은 상대적인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절대적 평가의 대상이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건 좋은 시인은 그 시대의 아웃사이더였다. 스스로 슬퍼하고 스스로 괴로워하므로 스스로 존재하는 독립적 개체였다.

그러면서 시인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한 시대를 뛰어 넘고 한 개인을 뛰어 넘는 작품을 남겼다. 그런 입장에서 신광철이란 시인이 오늘의 아웃사이더인 것은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 시인이 누구의 눈치를 보면서까지 시를 쓴단 말인가? 시인은 그 자신이 자기의 주인된 사람이고 세계의 중심, 우주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 그렇다면 시단의 아웃사이더야말로 시와 시인의 입장에서 이미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참된 주인, 중심 자리에 당당하게 위치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서 나 또한 신광철 시인과 더불어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자리매김 당하고 싶은 욕망에 도달한다. (때로 아닌게 아니라 사람들은 가끔 나를 '변방의 시인'이란 호칭으로 불러주기도 한다.) 청마靑馬선생은 당신의 두 번째 시집 <생명의 서 生命의 書> 서문에서 '나는 시인이 아니어도 좋다. 나는 시인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내용의 말씀을 적은 적이 있다. 신광철 시인이야말로 한 사람 시인이나 소설가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기를 자칭하고 나서는 인물이다.

오히려 신광철은 그런 까다로운 분류나 수식어로부터도 자유스러워지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는 다만 그저 한 사람의 자유인이다. 그저 한 사람으로서만 당당해지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유스러움과 당당함으로 천의무봉天依無縫의 삶을 꿈꾼다. 스스로 당연한 아웃사이더로서의 신광철. 이 얼마나 대단한 용기이고 자기 껍질 벗기기인가! 이 얼마나 멋진 사람이고 그의 삶인가!

나는 차라리 여기서 아웃사이더로서의 신광철을 만세 불러 찬양하고 싶은 심정에 이르고 만다.

3. 사랑의 눈으로 본 삶의 진경進境

시는 처음부터 까다로운 언어예술이기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것은 짧아야 한다느니, 정련精鍊된 언어조합을 가져야 한다느니, 고도의 비유체계를 갖추어야 한다느니 하는 형식적 요건이 그것이다.

허나 그 이전에 시의 내용에 대한 점검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시는 시인의 삶 자체와 관계가 깊다. 시인의 삶에서 체험이 나오고 그 체험에서 감정이 울어 나오게 마련이다. 이 감정이야말로 바로 시의 근원이 되어주는 것이다. 감정은 또한 그 시인의 인간 됨에 깊이 뿌리를 내린다. 그 시인의 삶이 고결하면 감정 또한 필히 그러할 것이라는 개연성蓋然性이 그것이다.

한 시절, 우리는 시인의 삶과는 무관하게 시인의 소산품인 시만 좋으면 된다는 식의 유미주의적唯美主義的 경향에 흐른 적이 있다. 그러다 보니 시에 있어서의 무엇(What)의 문제, 인간과 삶의 문제는 소홀히 되고 어떻게(How)의 문제, 언어와 표현의 문제만 강조되었다. 결과적으로 시들은 가시적인 수사에 치중한 공소함을 면치 못해 감동의 폭을 좁히고 말았다.

이제는 '어떻게'와 함께 '무엇'에 대해서도 진중鎭重한 주의가 있을 때라고 여겨진다. 모름지기 시도 좋아야 하지만 그 인간도 좋아야 한다는 얘기다.

또 하나, 오늘의 시를 두고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시 안에 들어있는 철학성 부재의 문제이다. 시에서의 철학이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진솔하고 본질적인 질문에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시의 뼈대가 되어 시를 튼튼하게 만들어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시를 보다 더 지속적으로 존재하게 해주는 힘을 제공한다.

철학의 방법은 명상이다. 시에 철헉적 요소를 가미한다는 것은 명상적 방법을 활용한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과 함께 우리의 시가 지리멸열支離滅裂하고 소란스러운 것은 바로 이 명상을 통한 철학적 방법이 부족한 탓이다. 이러한 시적인 제반 현실을 감안하면서 신광철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의 신선한 충격이다.

어느 탐험가는

모래사막을 걸으면서

고독이 두려워

물리면 죽는다는 전갈을 도시락에 넣고 다녔지요.

고독은 죽음을 각오할 만큼 삶을 창백하게 하지요.

사람의 척추는 조약돌을 쌓아올리듯 넓적한 뼈를

쌓아올린 흔들리는 구조지요.

인간의 직립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 그 취약한 척추에 엉겨붙은 허무를 내려놓고

꽃을 심는 손길을 보았습니다.

따뜻한 가슴을 지닌 온혈인간이었지요.

-<서시-온혈식물,꽃처럼>일부

이것은 시집 첫머리에 들어가는 서문 격으로 쓰여진 서시의 일 절이다. <모래사막을 걸어>가는 <어느 탐험가>의 <고독>을 예화例話로 삼아 인간은 왜 고독한 존재이며 고독이란 무엇이고 고독에서의 탈출의 길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들려주고 있다.

시인은 먼저 인간이 고독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조약돌을 쌓아올리듯 넓덕한 뼈를 / 쌓아올린 흔들리는 구조>를 지닌 <사람의 척추>에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인다. <인간의 직립>, 그 자체가 고독과 허무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목에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읽게 되는 것은 신광철이란 시인이 참으로 철학적이면서 명상적인 시인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그에 대한 구원의 길은 없는가? 시인은 또 <꽃을 심는 손길>이야말로 인간의 취약함과 허무와 고독을 내려놓는 진정한 길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대목에서 또한 우리는 신광철이라는 시인이 참으로 인간적인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시인은 우리 모두가 <따뜻한 가슴을 지닌 온혈인간>이어야 한다고 소근대고 있다. 신광철의 시집은 이렇게 그 첫 장면서부터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조용히 다루면서 우리에게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자신의 삶을 소리 없이 살아 지구의 한 구석을

아름다움으로 전염시키는 꽃처럼

내가 살아있으므로

행복해하는 한 사람이 있다면

성공한 삶일텐데

인생길이 멀다고

가다 말 수는 없는 걸

겨울이 와도 순정한 피 돌음으로 손금을 데워

너의 손을 따뜻한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온혈동물임을 감사했다.

발가벗은 너와 내가 뒤엉켜도 순수한 건

따뜻한 피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끝끝내

사람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

-<지구의 한 모퉁이> 전문

어디까지나 시인의 관심사항은 인간과 그의 삶에 있다. 그 인간은 <자신의 삶을 소리 없이 살아 지구의 한 구석을 / 아름다움으로 전염시키는 꽃>과 같은 삶을 사는 인간이고 그 인간의 삶은 <내가 살아있으므로 / 행복해하는 한 사람이 있는> 그런 삶이다. 그런 삶을 시인은 또 <성공한 삶>이라고 규정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인생길은 멀고> 험하다. <가다말고>싶은 심정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허지만 시인에게는 하나의 맏음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겨울이 와도 순정한 피 돌음으로 손금을 데워 / 너의 손을 따뜻한 손으로 잡을 수 있는 / 온혈동물>이라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끝끝내 / 사람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신광철 시인의 어법은 참으로 고요하고 차분하다. 비교적 젊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초연하기까지 하다. 그의 언어는 평이하면서 밝고 맑다. 이 명증성明證性이 <발가벗은 너와 내가 뒤엉킨> 정사장면까지도 투명한 식물성의 수채화로 보이게 한다. 이는 신광철의 시가 갖는 하나의 마력이다.

이와 같이 신광철 시인의 시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질은 끝없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자성적 자세에 있다.

신광철에 있어서 시는 인생이고, 인생은 시 그 자체이다. 그는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고 시를 살고자 하는 사람이다. 하루 하루의 삶이 바로 시이다. 그러므로 그의 인생체험은 진지하고 시에 대한 입장은 대단히 명상적이며 철학적이며 견고하다. 이처럼 한 아웃사이더 시인한테서 시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시의 내용으로써의 체험의 진지성과 시의 방법으로써의 명상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 시단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병폐와 소란스러움에 대신할 수 있는 한 장점으로 보여 믿음직스럽기까지 하다. 때로 활로는 이렇게 의도되지 않은 곳에 숨어있을 수 있다. 신광철의 시야말로 우리 시의 취약성을 보완할 수 있는 한 가능성이 아닐까? 그의 시를 읽다보면 관주寬珠를 쳐주고 싶은 구절을 아주 여러 곳에서 만나게 된다.

한 사람을 진정 사랑한다면 / 돌아보지마라./ 늑대처럼 덤벼드는 사랑을 하라./

-<늑대의 사랑.2> 일절

사랑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언제고 만났던 그 때처럼./ 한 사람을 사랑한다 해서/ 떠나는 사람의 옷자락을 잡아서는 안 된다.

-<늑대의 사랑.5>일절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기다림을 향해 흐른다.

-<봄길> 일절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꽃이 되라고/ 조용히 노래하는 것이다.

-<꽃> 일절

산을 배경으로 구름을 짊어지고/ 내려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하산> 일절

사랑하는 순간/ 울컥, 고립된다.

-<섬> 일절

아무리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라 해도 한 권의 시집 전체를 좋은 시로 채울 수는 없는 일이다. 좋은 시 몇 편이 그의 시집을 빛나게 하고 더 나아가 명편名篇의 시 몇 수가 남아 그 시인의 생애를 장식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달랑 한편의 시를 두고서도 마찬가지다. 참으로 좋은 구절 몇 줄이 받쳐주어서 시 전체가 밝아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러 이런 대목에 이르러 사람이 쓴 시(인시人詩)니, 신이 써준 시(신시神詩)니 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좋은 시, 주옥편이 되기 위해서는 필히 신이 써준 시 구절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산을 오른다./ 산을 오르려면 무너지고 주저앉는 /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산은 낮아지기 위해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 몸을 낮추며 길을 내려놓는다./ 오랜 시간을 들여 자신의 굵은 등뼈를/ 허물어내 산은 숲을 만들었다./ 돌배나무를 기르고/ 다람쥐를 기르고/ 노루 새끼와 앙징맞은 새 새끼를 기르는/ 숲을 만들었다./ 숲은 산을 닮아 지름길을 찾는 자는/ 길을 잃도록 발목까지 빠지는/ 풀을 기르고 있다.

-<산>전문

무릎이 탁, 쳐지는 빼어난 시이다. 시집 원고를 읽다가 이런 시를 만난다는 건 하나의 횡재다. <산을 오르려면 무너지고 주저앉는 /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표현이 신시일까? 아니면 <산은 낮아지기 위해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 / 몸을 낮추며 길을 내려 놓는다.>는 부분이 신시일까? 이런 시는 우리에게 하나의 깨달음을 주고 지혜를 준다.

지혜란 미래에 대한 앎이고 미지의 삶을 열어갈 힘이다. 시를 통해서 우리가 잠시나마 이러한 지혜를 빌린다는 것은 시가 가진 바 하나의 커다란 덕성德性이다.

처음에 신광철 시인의 시는 잡다한 인간세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그의 촉수는 오로지 본질적인 문제, 자연의 세계로만 열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시각은 지극히 미세하고 날카롭다. 작은 것, 보잘것 없는 것, 다른 사람들은 흔히 보지 못하는 것들을 즐겨 볼 수 있는 시력視力을 지녔다. 돌배나무, 노랑제비꽃, 노루새끼와 새 새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이내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이런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 모여 하나의 숲을 이루고 있음을 보아낸다. 부분과 전체를 함께 조망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숲은 그낭 그대로 숲이 아니다. <지름길을 찾는 자는 / 길을 잃도록 발목까지 빠지는 / 풀을 기르는> 숲이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이요. 비유로서의 숲을 말한다. 그리하여 숲과 산과 인간 세상은 동격의 자리에 선다. 이렇게 신광철에게 있어서의 자연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인간세계의 체험 그 너머에 실루엣으로 비쳐지는 또 다른 무늬로서의 자연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물을 이중二重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시인의 인식수준이 상당히 깊어졌음을 말해주는 증거겠다. 정작 자연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안에서 인간 세상의 또 다른 모습과 그 질서를 바라보고 있는 시인. 내내 머뭇거리다가도 어느 순간 준엄하고 빠르게 반전反轉시키는 시인의 어법은 사뭇 놀라운 바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그의 시 세계를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는 삶의 한 진경進境'이라고 말하고 싶다. 동시에 '명상이 어른거리는 시의 풍경'이라고 요약하고 싶다. 신광철에게서처럼 시와 사람이 잘 어울리는 경우는 드물다. 이러한 신광철 시인에게 내가 마지막으로 들려주고 싶은 말은 수세기 전 프랑스 땅에 살았다는 뷔퐁이라는 사람(Comte de Buffon. 1707-88)이 남겼다는 <글은 사람이다>란 말이다.

앞으로 신광철 시인이 인생의 사업도 깊어지고 시의 사업도 날로 번창하여 이 다음날 지구 여행을 마칠 때 이번 차례의 지구 여행이 참 좋았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자축할 수 있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