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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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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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의 제3대 연합참모본부총장 | |
임기 | 1957년 5월 18일~1959년 2월 26일 |
전임 | 정일권 |
후임 | 백선엽 |
대통령 | 이승만 |
부통령 | 장면 |
장관 | 김용우 김정렬 |
차관 | 김종갑 최세황 |
참모장 | 장석진 연참차장 |
국방부의 제19대 장관 | |
임기 | 1971년 8월 26일~1973년 12월 3일 |
전임 | 정내혁 |
후임 | 서종철 |
대통령 | 박정희 |
총리 | 김종필 |
차관 | 유근창 최광수 |
이름 | |
별명 | 호(號)는 국헌(菊軒)·자헌(自軒) |
신상정보 | |
출생일 | 1921년 8월 3일 |
출생지 | 일본 아이치 현 나고야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사망일 | 2011년 11월 26일 | (90세)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경력 | 초대 타이 군주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1960년 8월 31일 ~1963년 8월 27일 ) 대한석유공사 사장 한국골프협회 고문 신민주공화당 상임고문(1987년) |
정당 | 무소속 |
본관 | 강릉(江陵) |
부모 | 유승렬(부) 경주 정씨 부인(모)[1] |
형제자매 | 유한엽(형) 유대자(누이동생) 유광웅(남동생) |
배우자 | 윤의상 |
자녀 | 2남 3녀 (장녀 유인숙, 장남 유태종, 차녀 유영희, 차남 유형종, 삼녀 유미혜) |
친인척 | 유정남(조카딸) |
종교 | 불교→개신교 |
웹사이트 | 유재흥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군사 경력 | |
국방부 연합참모본부총장 시절의 유재흥 육군 중장 | |
복무 | 일본 제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
복무기간 | 1941년~1945년 8월 15일(일본군 육군) 1946년~1960년 8월 29일(대한민국 육군) |
근무 | 육군 제2군단 육군 제3군단 육군본부 육군 제1군사령부 연합참모본부 |
최종계급 | 일본군 육군 대위 대한민국 육군 중장 |
지휘 | 육군 제2군단장 육군 제3군단장 육군참모차장 육군 제1군사령관 연합참모총장 직무대리 |
주요 참전 |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
상훈 | 태극무공훈장(1951년 1월 1일 수교훈장(1968년 6월 1일 ) | )
유재흥(한국 한자: 劉載興, 1921년 8월 3일~2011년 11월 26일[2])은 제19대 국방부 장관을 지낸 대한민국의 군인 겸 외교관이자 정치인이었었다.[3] 호(號)는 국헌(菊軒)·자헌(自軒)이고, 창씨명(일본식 이름)은 에모토 쿄(江本 興)이며,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일본 제국 아이치 현 나고야에서, 당시의 일본 제국 일본군 조선인 육군 장교 유승렬 씨의 차남(둘째아들)으로 출생한 그는, 일제강점기 일본군 장교로 군문에 입문, 건국후 국군 창설기부터 군인이며 대한민국 외교관 겸 정치인 및 국영기업가였다. 그는 한국 전쟁 중 청천강 전투를 패전으로 이끈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장이었고, 현리 전투에서 패전과 함께 도망친 대한민국 육군 제3군단장이었다. 여러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실상 혼자 도주함으로써 대한민국 육군본부의 작전통제권을 상실하는 데에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하였다.[4] 또한 노무현 16대 대통령 당시 대한민국의 전시작전통제권을 찾아오자는 의견에 사실상 반대했던, 대표적 인물이다. 한국말 또한 할 줄 몰라서 차라리 곁에 통역관을 데리고 다녔었다. 부친인 유승렬도 일본군 대좌 출신으로 부자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생애
[편집]본관은 강릉(江陵)이며 호는 국헌(菊軒), 자헌(自軒)이다.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에서 출생하였고, 다섯 살 때인 1925년에 일제 시대 조선의 수도 경성으로 잠시 돌아와, 지난날 한때 평북 신의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그 후 충남 공주에서 성장하였다. 평안북도의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제55기)를 졸업했고,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에는 일본군 육군 대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한국군에 입대
[편집]미군정 시기에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국군의 육군 대위(군번: 10003)로 임관하였다. 육군사관학교 부교장으로 있다가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제주 4·3 사건에 관여하였다.[5] 1948년 6월, 육군 제4여단장에 보임되었으며, 이듬해 1949년 5월 12일 육군 제6사단장에 전임 임명되었고,[6] 같은 해 1949년 8월에는 육군 제6사단장 직위에서 육군 제2사단장 겸 육군 태백산지구전투사령관 직위로 전임되어 북한군 게릴라 침투 저지 작전을 폈다.[7]
한국전쟁에서의 지휘
[편집]- 육군 제7사단의 궤멸
1950년 3월에 육군 제7사단장으로 보임된 후 3개월만에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7사단이 방어한 의정부 축선으로 북한군은 보병3사단과 4사단,105전차여단을 투입해 맹공을 펼침으로써 중과부적의 7사단은 지연전을 펼치며 덕정-의정부-창동으로 축차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 육군 제2군단의 전멸
그 후 1950년 7월 경상북도 함창에서 육군 제2군단이 창설될 때 육군 제2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중공군 참전 이후 벌어진 덕천 전투에서 지휘 실수로 중공군 38군과 42군에 포위를 허용하여 제2군단 6사단, 7사단, 8사단이 괴멸적 타격을 입고 해체되었다.
- 육군 제3군단의 해체
이후 1951년 3월에 육군 제3군단장으로 전임되었고, 현리 전투에서도 제3군단 예하 3사단, 9사단이 괴멸적 타격을 입고 해체되어 한국 전쟁에서 지휘한 전투마다 패전하였다.
- 지휘권 없는 특정 보직
이로 인하여 1951년 5월 25일 육군참모차장으로 전임되어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정전회담에 남한 측 옵서버로 참관했으나 부친 유승렬 대좌에 의해 어릴 때부터 일본 군인 교육을 받아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했다.[8] 1952년 7월 육군 제3군단장에 다시 보임되어 1953년 3월까지 있었다.
한국 전쟁 이후
[편집]1953년 3월부터 1954년 3월까지 육군참모차장으로, 이후 1957년 5월 17일까지 세번째 육군 제3군단장으로, 다음 1959년 2월 26일까지 국방부 연합참모총장으로 있었다. 이후 육군 제1군사령관으로 보임되어 1960년 5월 31일부터 연합참모총장 직무대리를 겸하다가 4·19가 발발함으로 인하여 이승만이 하야한 뒤 정군 대상으로 지목되어 1960년 8월 29일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후
[편집]5·16이 성공한 뒤 박정희 정권의 제3공화국에서 등용되어 주 태국 대사로 있던 1962년 9월 친선사절단으로 버마를 방문하였다.[9] 1963년 주 스웨덴 대사에 임명되었다.[10] 이어 주 이탈리아 대사에 임명되었다.[11] 1970년 대통령 안보담당·국방담당 특별보좌관에, 1971년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다. 퇴임 후 1974년부터 6년간 대한석유공사 사장으로 있었다. 1978년 석유화학공업협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83년 한스칸디나비아재단 이사장이 되었고, 전직 장성 모임인 성우회의 부회장으로 있다가, 1991년 성우회 회장이 되었다.
최후
[편집]2011년 11월 26일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2011년 11월 29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됐다.[12]
가십거리
[편집]북한에선 유재흥의 6.25당시 공로를 인정하여 통일 후에 최고의 예우로 모시고 최고 등급 훈장을 수여하기로 정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였으나 확인불가이고 근거도 없으며 우스갯 소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논란
[편집]현리전투는 1951년 5월 중공군의 5월공세 당시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에게 점령당하여 지휘하던 3군단이 포위됐을 때 벌어진 전투로, 유재흥은 3사단장을 대리로 지정한 후 군단전체가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 군단 사령부로 복귀하겠다며 경비행기를 이용해 포위망 밖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따라 3군단은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와해 상황이 되었으며, 사단장들을 비롯한 모든 지휘관들이 지휘를 포기하고 계급장을 제거한 후 살기위해 무질서한 도피를 시작했다. 결국 현리 전투의 결과 군단 병력의 30%와 중장비의 70%를 손실하게 되었고,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밴 플리트 장군에 의해 3군단은 해체되었다.
이 사건은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 장교의 작전능력을 철저하게 불신하게 된 계기였다. 당시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한국군의 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권을 미군 장성들에게만 부여하였다. 1군단 또한 육군본부를 지휘선 상에서 제외하고 미군 사령부에서 직접적인 지휘를 받도록 하여, 이 시점부터 모든 한국군의 작전권이 상실되었다.[13]
현리 전투 중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과의 다음 대화는 아직까지도 유명하며 현리에서의 국군의 치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밴 플리트 :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 밴 플리트 :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 "그런 것 같습니다."
- 밴 플리트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정(일권) 장군에게 다른 보직을 상의하시오!"
기타 논란
[편집]- 1990년대 이후 전시 작전통제권 회수 등의 국방 관련 현안에 대해 친미 성향의 보수 세력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미군에게 일임하자는 데 큰 역할을 하여 많은 비아냥을 사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199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탈출한 전쟁포로 출신 조창호 소위가 유재흥과의 면담을 원하였으나 2006년 조 소위가 사망할 때까지 일체의 만남을 거부했다는 등의 왜곡이 인터넷 상에 확산되기도 하였다.[14] 경북 경산 하양초등학교에는 유재흥 장군 전승기념비가 있다.[15]
- 2004년 노무현 전대통령이 미군으로부터 전시작전권을 회수하겠다고 발표하자 예비역 군 장성 2명이 반대성명을 발표하는데 그 성명의 대표자가 바로 "유재흥"이었다.
평가
[편집]- 대표적인 친일파 정치 군인이다. 일본군 장교로 있다가 8.15 광복 이후, 안재홍 민정장관·존 리드 하지 사령관 등을 비롯한 미 군정이 김규식 과도입법의장 등의 협조를 받으면서 행정, 군사 분야에 유경험 인력들을 그대로 차용하려는 안일하고 편의적인 정책을 택함으로써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진입할 수 있었다.
- 대한민국 육군본부의 전시 작전통제권이 미국으로 넘어가는 데 사실상 결정적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며, 최악의 패전 군인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16]
상훈
[편집]한국 전쟁 시 잘못된 상황판단으로 본인 지휘 하의 1개 사단과 2개 군단이 패주 후 해체되는 결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951년 1월 1일 (신묘년 새해 첫날)에, 태극무공훈장을 비롯, 1968년 6월 1일 , 수교훈장 등 여러 차례 훈장을 받았다.
학력
[편집]- 함북 경원군 경원소학교(전학)→함북 청진부 나남소학교(전학)→경성부 삼판소학교(졸업)
-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전학)→평북 신의주고등보통학교(졸업)
- 일본 육군사관학교 55기(졸업)
- 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졸업)
- 미군정 시대 통위부 보병학교(졸업)
- 미국 육군참모대학교(졸업)
비학위 수료
[편집]-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수료)
직계 가계
[편집]- 아버지 : 유승렬(劉升烈, 1893년생~1958년졸)
- 어머니 : 정열(鄭列, 1899년생~1983년졸)[17]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어머니 유정렬(劉鄭列, 본명: 정열(鄭列), 1899년생~1983년졸, 청나라 만주 지린 퉁화 출생으로, 친정은 대한제국의 평안북도의 의주군의 경주 정씨 가문의 후손.)은, 1899년 청 제국의 만저우 지역의 지린 성 퉁화(通化) 출신의 대한제국계 후손 출신이자, 만주 둥베이 지역의 준(準)이주자 출신으로, 1912년 5월 당시에 일본 제국 히로시마 현 히로시마(廣島)에 유학 및 간이(簡易) 이주를 하던 와중에, 일본 제국의 일본군 조선인 육군 장교였던, 이른바 조선의 충청도의 공주군의 조선인 청년 출신의 어언 6년 연상남인, 유승렬(劉升烈)을 만나, 어언 3년여 훗날 1915년 1월 1일 (을묘년 새해 첫날)에 결혼하여, 그 후 3남 1녀(4남매)를 얻음.
- ↑ “유재흥”. 엠파스 인물정보. 2008년 3월 31일에 확인함.
- ↑ 1948년 6월 당시의, 대한민국 육군 장교 시절에도, 어찌 오히려 한국말을 일본말보다 더 못하는 등, 한국말이 너무도 서투르기 짝이 없는 탓에, 일본말이 차라리 모국어인가 싶을 정도로, 대한민국 국군의 수치였으나, 한국 전쟁 시절이자, 육군 제3군단장 시절의 1951년 현리 전투의 패전의 수모 등을 겪음과 동시에, 1년 이전의 육군 제2군단장 시절의 1950년 영천 전투의 승전으로 인한 전세 역전의 계기로 삼게 된, 희대의 최악의 패장 유재흥 육군 제2군단장의 전공은 아무리 군사적으로도, 희대의 아이러니한, 시대적인 한 대목.
- ↑ 김진혁. 전시작전통제권과 세 명의 대통령. 뉴스타파. 2014년 11월 19일.
- ↑ “악전고투 끝에 폭동 완전 진압” 유재흥이 부임한 1949년 3월 이후에도 불법적인 군사재판에 의한 학살과 시신 암매장이 있었음.
- ↑ “각 여단을 사단으로 승격”. 동아일보. 1949년 5월 20일.
- ↑ 조갑제 (2011년 11월 28일). “낙동강 방어전의 영웅 劉載興 장군 별세”. KONAS.
- ↑ 정경모, 판문점의 국군 장성 ‘일본말이 모국어’
- ↑ 양승윤 (2005). 《미얀마》.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쪽. ISBN 8974643634.
- ↑ “瑞典大使에- 劉載興씨任命”. 경향신문. 1963년 8월 7일.
)
- ↑ “12國大使任命의결”. 동아일보. 1967년 9월 16일.[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한국전 ‘최악의 패전’ 장군, 국립현충원에 안장〉《한겨레신문》(2011년 11월 30일)
- ↑ 백선엽,老兵이 걸어온 길-56-사흘간의 2군단장 보직 Archived 2018년 10월 6일 - 웨이백 머신, 국방일보
- ↑ 국군포로 1만9천명 추정 2000년 8월 21일 경향신문
- ↑ “역대 국방장관들 `전시작통권 국회 동의 거쳐야`”. 중앙일보 (연합뉴스 인용). 2006년 8월 10일. 2008년 3월 31일에 확인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한국전 ‘최악의 패전’ 장군, 국립현충원에 안장〉《한겨레신문》(2011년 11월 30일)
- ↑ 1946년 8월 15일개명하여, 유정렬(劉鄭列)이라는 이름으로 불림. 이후부터 성씨까지 바꾸고
- ↑ 1917년 5월 28일미군정 조선 시대 말기의 수도 서울로 귀경(귀거)을 하였으나, 1948년 6월 16일 미군정 조선 시대 말기의 수도 서울에서 갑자기 병으로 하세. 일본 히로시마 현 히로시마 출생으로, 1945년 8월 15일 광복(을유 해방)이 도래한 이듬해(1946년 3월 5일 ) 당시, 충청남도 공주 향리를 떠나
- ↑ 〈유재흥 전 국방장관 별세〉 《서울신문》(2011년 11월 28일) 27쪽.
- ↑ 〈강태순 두산 고문 모친상 外[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서울경제》 (2011년 11월 27일)
- ↑ 1928년 3월 21일일제 시대 함북 경원 출생. 1938년 4월 21일 , 직족들과 함께 평북 신의주 향리를 떠나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있다가, 일본 도쿄(東京)에서 1941년 3월 14일 소학교 졸업 4년 후, 1945년 8월 15일 광복(을유 해방)이 도래한 이듬해(1946년 3월 25일 ) 당시, 미군정 조선 시대 말기의 수도 서울로 귀국(귀거)을 하여, 훗날 성혼 및 출가(1947년 결혼 및 슬하 1남 4녀 5남매 득)까지 하는 등등으로, 1946년 이후부터 어언 60년 동안 삼팔선의 남쪽의 서울특별시에 정주하는 등의 그 일평생토록 2006년 4월 12일 , 하세할때까지 대한민국의 국민의 일원으로 지냄.
- ↑ 1935년 5월 11일일제 시대 평북 신의주 출생. 1938년 4월 21일 , 직족들과 함께 신의주를 떠나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있다가, 일본 도쿄(東京)에서의 소학교 4학년 시절이던 1945년 8월 15일 광복(을유 해방)이 도래한 이듬해(1946년 3월 25일 ) 당시, 미군정 조선 시대 말기의 수도 서울로 귀국(귀거)을 하여, 삼광국교 5학년 1학기로 전입(편입)을 하여 1948년 3월 9일 , 삼광국교를 졸업하여, 상급학교까지 진학 훗날 성혼(1969년 결혼 및 슬하 1남 2녀 3남매 득)까지 하는 등등으로, 1946년 이후부터 어언 70년 동안 삼팔선의 남쪽의 서울특별시에 정주하는 등의 그 일평생토록 2016년 6월 24일 , 하세할때까지 대한민국의 국민의 일원으로 지냄.
참고 자료
[편집]- 유재흥(劉載興) - 한국행정연구원
- “유재흥(劉載興)”. 전쟁기념관. 2008년 3월 31일에 확인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전임 정일권 |
제3대 국방부 연합참모본부총장 1957년 5월 18일~1959년 2월 26일 |
후임 백선엽 |
전임 백선엽 |
연합참모본부총장 직무대리 1960년 5월 31일~1960년 8월 29일 |
후임 최영희 |
전임 (초대) |
초대 주(駐)타이 대한민국 대사 1960년 8월 31일~1963년 8월 27일 |
후임 이동원 |
전임 정래혁 |
제19대 국방부 장관 1971년 8월 26일~1973년 12월 3일 |
후임 서종철 |
- 1921년 출생
- 2011년 사망
-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
- 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
- 태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
- 이탈리아 주재 대한민국 대사
- 스웨덴 주재 대한민국 대사
- 일제강점기의 장교
- 불교를 이탈한 사람
- 대한민국의 개신교도
- 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
- 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
- 대한민국의 연합참모총장 직무대리
- 대한민국의 합동참모의장
-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 서울삼광초등학교 동문
- 송도고등보통학교 동문
- 일본 육군사관학교 동문
- 군사영어학교 동문
- 육군사관학교 동문
- 통위부 보병학교 동문
- 육군보병학교 동문
-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동문
- 나고야시 출신
- 공주시 출신
- 태극무공훈장
- 재일 한국인
- 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강릉 유씨
- 한국국민당 (1981년) 당원
- 신민주공화당
- 대한민국 육군 중장
- 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