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후재 초상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 |
종목 | 유형문화재 제154호 (1986년 4월 28일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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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 | 1폭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 | 평산신씨종중 |
위치 | |
주소 |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 209 규정영당 |
좌표 | 북위 37° 6′ 57″ 동경 127° 40′ 9″ / 북위 37.11583° 동경 127.66917° |
정보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
신후재 초상(申厚載 肖像)은 조선 초기의 문신 신후재를 그린 초상화이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4호로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에 있다. 신후재의 후손이 관리하는 규정영당에 보관되어 있다.[1]
영정은 좌안 8분면의 정장 관복을 입고 의장에 앉은 전신상이다. 복식은 숙종연간의 제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초상화와 달리 이 영정에서는 공수(拱手)를 취하지 않고 양손에 홀(笏)을 받들었고, 긴 손톱의 형용 단령위에 각대를 나타내지 않았으며, 의자와 족좌대가 겹쳐진 부위가 불합리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2] 이 초상화는 후손가에 전해오는 바대로 청나라에 다녀왔을 때의 것으로 추정되어 초상화사 연구에 주목할 만한 자료이다.
신후재(1636년 ~ 1699년)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산, 호는 규정이다. 현종 원년(1660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올라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나, 경신 대출척으로 사직되었다가 기사환국(1689년)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우승지,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사은사 겸 진주 주청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개요
[편집]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신후재(1636∼1699) 선생의 초상화이다.
신후재는 현종 원년(1660)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갑술옥사(1694)에 얽혀 옥살이를 한 후에는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초상화는 관복을 의젓하게 차려입고, 홀(笏:신하가 허리띠에 차고 다니는 패)을 두 손으로 받쳐든 채,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이다. 관복의 차림새가 숙종 대의 양식으로 보이나 초상화 양식이 당시의 기법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두 손을 모아 관복의 소매 안에 넣지 않고 홀을 받들어 쥔 점, 손톱을 두드러지게 그린 점, 의복 위로 허리띠를 그리지 않은 점, 의자와 발받침대가 겹쳐진 부위의 어색한 표현 등이 그러하다.
이처럼 독특한 표현양식으로 보아, 선생이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올 때에 가지고 온 것으로 추정된다. 초상화의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하주성 (2010년 2월 8일). “여암 신후재의 영정을 모신 규정영당”. 오마이뉴스. 2012년 2월 7일에 확인함.
- ↑ “신후재영정(申厚載影幀)”. 음성신문. 2011년 7월 28일. 2012년 2월 7일에 확인함.
참고 자료
[편집]- 신후재 초상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