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 (고려)
강종
康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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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고려 국왕 | |
재위 | 1212년 2월 6일 ~ 1213년 9월 2일 (양력) |
전임 | 희종 |
후임 | 고종 |
고려국 왕태자 | |
재위 | 1173년 6월 8일[1] ~ 1197년 11월 11일[2] (양력) |
전임 | 효령태자 |
후임 | 왕태자 영 (희종) |
이름 | |
휘 | 왕오(王韺) · 왕정(王貞) → 왕숙(王璹) |
묘호 | 강종(康宗) |
시호 | 준철문열단총명헌이모목청원효대왕 (濬哲文烈亶聰明憲貽謀穆淸元孝大王) |
능호 | 후릉(厚陵)
개성특별시 개풍구역 현화리 |
작호 | 한남공(漢南公) |
신상정보 | |
출생일 | 1152년 5월 17일(양력) |
출생지 | 고려 개경 개성부 |
사망일 | 1213년 9월 2일(양력) | (61세)
사망지 | 고려 개경 수창궁 화평전 |
부친 | 명종 |
모친 | 광정왕후 김씨 |
형제자매 | 8남 2녀 중 장남 |
배우자 | 사평왕후 이씨, 원덕왕후 유씨 |
자녀 | 1남 2녀 (10남 2녀)
수령궁주, 고종, 정화택주, 소군 9명 |
강종(康宗, 1152년 5월 17일 (음력 4월 5일), 율리우스력 5월 10일 ~ 1213년 9월 2일 (음력 8월 9일), 율리우스력 8월 26일)은 고려의 제22대 국왕(재위: 1212년 2월 6일 (1211년 음력 12월 25일), 율리우스력 1211년 1월 30일 ~ 1213년 9월 2일)이다.
개요
[편집]휘는 오(祦), 자는 대화(大華) 또는 태화(太華), 묘호는 강종(康宗), 시호는 명헌원효대왕(明憲元孝大王), 능호는 후릉(厚陵)이다. 명종과 광정왕후 김씨의 맏아들이다.
1212년부터 1213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최충헌(崔忠獻)이 실권을 맡았다.
생애
[편집]탄생과 가계
[편집]강종의 초명은 왕숙(王璹)으로, 1152년(의종 6년) 4월 5일, 인종과 공예태후의 셋째 아들인 왕자 익양공(명종)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의정왕후 김씨이며, 문종의 손자인 강릉공 왕온의 셋째 딸인데 모계 성씨인 김씨를 사용하였다.
태자 책봉과 폐위
[편집]1170년(의종 24년), 무신정변으로 의종이 폐위되고 아버지 익양공이 추대되자 따라서 입궁하였으며, 1171년(명종 1년) 관례를 올리고, 1173년(명종 3년) 왕태자에 책봉되었다.
첫 부인인 태자비 이씨(사평왕후)는 무신정변을 일으킨 이의방의 딸 이었으나, 이의방 사후 폐출되었다. 이후 종실 신안후와 인종의 3녀인 창락궁주의 딸 유씨(원덕왕후)와 혼인하였다.
1197년(명종 27년), 명종이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어 창락궁에 유폐되면서 폐태자 되었으며 이후 강화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즉위와 사망
[편집]1210년(희종 6년) 소환되어 이듬해 수사공 상주국 한남공(守司空·上柱國·漢南公)에 봉해졌으며, 희종을 폐한 최충헌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실권은 최충헌에게 있었다. 능은 개성특별시 개풍구역 현화리에 있는 후릉(厚陵)이다.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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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편집]
왕비[편집]
왕자[편집]
왕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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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이 등장하는 작품
[편집]각주
[편집]- ↑ 명종 1년 음력 4월 19일, 율리우스력 6월 1일
- ↑ 명종 27년 음력 9월 23일, 율리우스력 11월 4일
- ↑ 한남백 왕기와 예종의 장녀 승덕공주의 아들
- ↑ 인종의 3녀
- ↑ 희종의 장녀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소군(小君)이란 고려시대 어머니가 궁인이거나 혹은 국왕의 사랑을 받은 첩에서 태어난 왕자들을 출가시켜 승려로 삼은 왕의 서자들을 말한다.
고려사회에서는 이들의 어머니가 천민 출신이기 때문에 승려가 될 수 없었으나, 이들의 정치참여를 제도적으로 막기 위해 출가시켰다.
- 허흥식,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86, 330·510~511쪽.
- 채상식, 『고려후기불교사연구』, 일조각, 1991.
- 황병성, 『고려무인정권기연구』, 신서원, 1998, 285쪽.
- 김당택, 『고려의 무인정권』, 국학자료원, 1999, 326~327쪽.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고려사》 권129, 열전 권제42, 반역(叛逆), 최충헌(崔忠獻)
최충헌과 최충수가 명종을 폐위하고 신종을 옹립하다
최충수가 박진재(朴晉材)와 함께 최충헌을 찾아가 모의했다.“지금의 임금(명종)은 왕위에 있은지 28년이나 되어 늙은 데다 일에 염증을 내고 있습니다.
또 소군(小君)들이 항상 임금의 곁에 있으면서 그의 은혜와 위엄을 도용해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임금도 소인배들을 총애해 금과 비단을 함부로 하사했기에 국고가 텅 비어 신료들과 백성들을 다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태자 왕숙(王璹, 강종)은 궁비(宮婢)들을 가까이 해 아들 아홉 명을 낳았는데 각각 소군(小君)에게 보내어 머리를 깎아 제자로 삼게 했습니다.
게다가 성품도 어리석고 유약하니 태자로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충헌 [崔忠獻]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 ↑ 《최충헌 묘지명》
같이 보기
[편집]제22대 고려 국왕 | ||
전 임 희종 |
1211년 ~ 1213년 | 후 임 고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