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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법인 백암학원(백제예술대학교) 설립자
대한민국 국민방송을 키운 이환의 사장
대학가요제 선풍 일으킨 업적, 영암아리랑으로 남다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 정치부장
내무부 기획관리실장
전라북도 도지사
국회의원
한국언론금고 초대 이사장
한국방송협회 부회장
중앙대신문방송대학원 교수
백제문화연구원 상임고문
학교법인백암학원(백제예술대학) 설립
경향과 MBC 매스컴센터로 변모
MBC 대학가요제 및 강변가요제 개최
명랑운동회, 수사반장, 113수사본부 등 오락/드라마 프로 제작
이환의 전 MBC 사장이 향년 90세의 일기에 지난 11일 별세했다고 18일 전주이씨대동종악원과 학교법인 백암학원(백제예술대학교)이 전했다.
이 전 사장은 오랜 투병 끝에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으며 고인의 유언에 따라 장례는 외부에 알리지 않고 가족들만 참석해 선산에 수목장으로 치러졌다. 고인은 살아계실 때도 전혀 가족 이외는 문병을 받지 않는 걸로 알려져 근황을 알 수가 없었을 정도로 고인은 외부와의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He is 이환의
고인이 되신 이환의 전 사장은 영암 서호면 몽해리 아천마을 출신으로 광주서중학교 졸업(26회), 광주고등학교 졸업(2회),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를 졸업하고 이후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를 거쳐 정치부장을 역임했다. 1966년에는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기획관리실장으로 공직에 몸을 담았으며 이후 전라북도 도지사를 지낸 뒤 1971년부터 문화방송(MBC) 사장이 되었으며 1974년에는 경향신문과 합병하여 (주)문화방송.경향신문 사장이 되어 두 매체를 맡았다. 중앙대신문방송대학원 교수, 백제문화연구원 상임고문 등을 역임했으며 1990년 학교법인백암학원(백제예술대학)을 설립했다.
고인은 MBC 사장으로 있으면서 임기 9년 동안 경향과 MBC를 매스컴센터로 변모시키고 MBC 대학가요제 및 강변가요제 개최를 비롯해 명랑운동회, 수사반장, 113수사본부 등의 숱한 오락/드라마 프로 제작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현재 오락특화 채널인 MBC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하였다.
그 외에도 1974년부터 한국언론인금고 초대 이사장, 1979년부터 한국방송협회 부회장까지 맡았다.
고인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직후 9주)문화방송.경향신문 사장 및 한국언론금고 이사장, 방송협회 부회장직에서 사실상 경질되었다. 이후 문중단체 청권사 이사장에 전념하며 중앙대 신방과 객원교수, 백제문화연구원 상임고문을 역임하였고,
1989년 학교법인 백암학원을 설립해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후 1992년 백제전문대학을 열었다. 한편 고인은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가 발의한 5.18 광주민주화운동 특별법에 서명하였다.
1996년부터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종중으로서 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악원 이사장으로 16년간 재임하였다.
영암아리랑 작사, 달도 뜨고 영암도 떳다
영암아리랑은 백암(白岩) 이환의 고인이 MBC 사장으로 있을 때 김일태 영암군산악회장(전 영암군수) 등 산악회원들이 이 사장을 찾아와 영암을 전국에 알릴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 방송해달라는 주문에 의해 고인이 낳고 자란 서호면 몽해리 아천마을이 있는 서호강 몽해들을 배경으로 하여 가사에 넣는 등의 월출산 풍경과 함께 초안을 잡아 노래가사를 써 곡을 붙여 그의 아호를 따 '백암 작사' 이렇게 하여 하춘화 가수에게 부르게 했다.
가수 등용문 대학가요제 선풍, 젊은 꿈 실현 분출구 마련
고인은 문화방송 사장으로 있으면서 가수의 등용문이었던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 를 신설해 대학생을 위한 가요제, 명랑한 대학 풍토조성과 건전한 음악생활 향유, 건전가요 발굴 따위의 목적으로 수많은 가수들을 배출하였다. 취약한 미디어 체계, 변화적인 시대상황 등으로 인해 예술에 대한 민중적 갈망은 컸고 MBC 대학가요제는 공영방송 주도의 프로그램으로 압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가요제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MBC를 MBC답게 만든 것은 대학가요제 였다. 모두가 숨죽이던 군사정부 시절, MBC가 기획한 대학가요제는 신선한 충격과 도발 그 자체였을 정도로 고인은 젊은 학생들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기회의 문을 열어줬다. 그러면서 MBC는 시대를 앞서가는 방송사라는 환상을 젊은 세대들에게 심어줬다. 어떤 면에서 대학가요제에 채무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젊은 대학생들은 MBC가 우리에게 빚진 방송사라고 생각할 만큼 대학가요제를 통해 가수의 길을 걷게 된 분들, 자신에게 먹여 살리고 키워준 고마운 프로였으며 역사성 자체인 프로그램으로 성장시켰다.
대학생들의 존경한 인물로서의 우상과 선망의 대상이 됐던 추앙을 받았던 고인은 목마른 젊은이들에게 갈증을 해소해주는 샘물이 되어주었다. 젊은 패기를 분출하도록 분출구를 마련해줬다. 1세대를 벗어나지 못한 대한민국 미디어 산업을 제3세대로 이르게 할 만큼 혁신적인 발상으로 도약시키는 등의 국민 속으로 다가서는 공감 프로그램을 편성해 젊은이게는 꿈을 문화계에는 미래를 나라에게는 선진화를 가져다주는 일에 선도자로서의 충실한 고인이었다.
고인의 큰 족적인 MBC의 상징성이 되게 했던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는 사라졌지만 고인의 영혼에 의해 지금도 그때 그 학생들한테 기억되고 있다. 젊음, 낭만, 음악, 축제의 행사로 일대 돌풍을 일으키게 했던 문화계의 선봉자였다.
미디어문화 산업 역꾼으로서의 큰 족적을 남길 정도로 일대 혁신을 하여 대한민국 방송문화가 국민들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었던 고인은 미디어문 황태자로서의 역할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정계에 발을 디디며 대한민국 정차사에도 족적을 남겼다. 고인은 14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으나 연거푸 고배를 마셔 고인이 꿈꾸던 정치 선진화에는 큰 기여를 못하고 말았지만 정치가 국민을 위한 진정한 국회로서의 정의롭게 가는데 나름대로의 열정을 보였다. 고인은 MBC를 문화방송답게 MBC를 최고의 미디어매체로 만들어 낸 방송계의 신화적인 인물이였으며 고향 영암을 빛낸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남은 위인이었다.
고인은 또한 고향 영암을 알리기 위한 고향을 대표할 곡을 만들어 영암을 세상에 크게 알리는데 큰 역할을 띠었다. 영암 학산에 아버지의 태와 혼을 담고 있는 영암의 딸 하춘화 가수에게 '영암아리랑(백암 작사, 고봉산 작곡)' 을 부르게 하여 고인이 테어난 고향 영암이 세상 사람들한테 깊이 각인 되게 했을 정도로 고향 사랑에 각별했다. 어릴 적에 고향을 떠났던 고인은 다시 사후에도 고향을 잊지 않겠다며 고인이 노래가사로 담았던 서호 몽해 서호강과 들이 바라보이는 부모가 묻힌 선영의 선산에 수목장으로 영면했다.
유족으로 부인 전순남씨와 아들 기훈.기범씨, 딸 은주씨가 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백제예술대학교 교직원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