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키신저와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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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12.01. 오전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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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6·25전쟁이 터졌을 때 헨리 키신저가 미 대통령의 귀를 잡고 있었다면 휴전선은 지금보다 150~200km 북상(北上)했을지 모른다. 키신저는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국이 중국을 자극하지 말고 청천강과 함흥만을 연결하는 선(線)이나 남포~원산 주변의 북위 39도를 기점으로 휴전했어야 한다고 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 국민은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1954년 하버드대 박사가 될 때부터 강대국 위주의 세력 균형에 관심을 가진 키신저에게 중견 국가나 약소국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2017년엔 미국과 중국이 ‘북한 정권 붕괴와 주한 미군 철수’를 맞바꾸는 ‘빅딜’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당사국인 한국의 입장은 무시한 채 패권 국가로 떠오른 중국을 인정, ‘거인’들끼리 동북아 안보를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TIME지 표지에 20번 넘게 등장할 정도로 화려한 경력을 가진 그에게 가장 굴욕적인 순간은 1973년 노벨 평화상 수상이다. 그가 베트남 평화협정의 공으로 레 둑 토 월맹 정치국원과 함께 노벨상을 받게 되자 노벨위원회 위원 2명이 항의의 의미로 사퇴했다. 뉴욕타임스는 그가 남미 군부 정권을 지지하고 캄보디아 비밀 폭격 작전 등에 책임이 있다며 “노벨 전쟁상을 받았다”고 조롱했다. 결국 키신저는 시상식에 참가하지 못했고, 1975년 베트남 적화 후 노벨상 반납 의사를 밝혔다.

▶30일 키신저가 100세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은 올 초 “꺼지지 않는 호기심으로 세상과 역동적으로 소통하는 것”을 그의 장수 비결로 꼽았다. 축구 팬인 그는 자신의 독일 고향 축구팀의 평생 후원자 겸 명예회원으로 지냈다. 여성에게도 호기심이 많아 국무 장관으로 재직 중에도 틈틈이 연예인들과 데이트를 즐겨 신문 가십난에 오르내렸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며 재산을 약 5000만달러(약 646억원) 규모로 불렸다.

▶키신저의 호기심이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은 인공지능(AI)이었다. 그는 90세가 넘으면서 AI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 2021년 에릭 슈밋 전 구글 CEO 등과 ‘AI의 세계’를 출간했다. 지난 5월 100세 기념 인터뷰에서 “역사상 적군을 완파할 능력이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제는 AI 때문에 그런 한계가 없어졌다”고 경고했다. 키신저가 최후까지 관심을 갖던 AI가 국제 문제에서 그에 버금가는 통찰력을 발휘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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