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추석 차례상, 술·과일·포·식혜·국수 정도로 단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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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9.14. 오전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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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SNS에 ‘추석과 담배는 백해무익이니 무조건 없어져야 한다’는 글이 올라왔고, 이에 호응하는 댓글이 쇄도했다. 추석은 수확의 계절을 맞아 풍년을 감사하며 햇곡식으로 밥과 떡과 술을 빚어 조상에게 차례 지내고 성묘하는 민족 최대 명절이다. 서양의 추수감사절과 비슷한, 조상과 대지의 신에게 감사하는 그야말로 즐거운 날인데 없어져야 한다는 과격 발언은 왜 나오는 걸까. 추석 차례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한상 가득 음식을 장만해야 하는 주부의 고달픔이 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복잡한 의례를 솔선수범해 왔던 종가에서도 간소한 추석 차례상을 선보이고 있다.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왕실에선 추석 차례상 제물로 목면(메밀국수)을 올렸다. [사진 온지음]
복잡한 제사 상차림 규칙이나 전통은 오히려 민족이 지켜온 의례 상차림의 존재 이유와 의미마저 혼란스럽게 한다. 제사상을 차리면서도 조상을 기리는 여러 기제사와 명절 차례(다례)를 이해 못하는 사림들이 많다.

당대의 제사 문화와 음식 문화를 충실하게 반영한 연구 자료로서 조선 왕실을 예로 들면, 왕실에선 제사로서의 다례(차례)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궁중의 제사 다례로는 탄일다례, 기신다례, 주다례, 절기다례 등이 있는데 ‘탄일다례’는 죽은 이의 생일을 맞아 이를 기리는 제사다. ‘기신다례’는 고인이 돌아가신 날 지내는 제사다. ‘주다례’는 상례를 치르는 동안 죽은 이에게 매일 정오에 올리는 제사로 지금은 장례식장에서 모든 행사를 치르니 크게 의미가 없다. 정초,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등 명절에 지내는 ‘절기다례’는 설날과 추석에 조상에게 드리는 차례가 남아 있는 정도다.

우리는 ‘메뉴’라는 외국어에 익숙하지만, 고어에는 이에 해당하는 한글 단어 ‘발기(ᄇᆞᆯ긔)’가 있다. 특히 기록을 중시한 조선 왕실에선 상차림의 음식명을 세세히 기록한 음식 발기를 많이 남겼다. 한자로도 기록했지만 대부분 여성이 한글로 기록해 이해도 쉽다. 왕실의 중요한 행사였던 제사 상차림의 음식명을 쓴 기록은 ‘제향발기’라고 하는데,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가 정리한 ‘경우궁제향발기’가 남아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기신다례에는 8촌(24㎝) 높이의 고임 음식으로 가장 많은 제물을 올렸다. 약과, 중박계, 홍산자·백산자, 강정, 각색 절육, 오미자·율·흑임자·송화다식, 생리, 준시, 생률, 율·조·백자병, 화채, 석이단자, 약식, 전복초, 생선전유어, 해삼전, 양전유어, 간전유어, 편육, 족편, 각색누름적, 나복채, 어적·우적·전체수, 식혜, 홍합탕, 생치탕, 목면, 추청, 초장, 개자 등 30기 48종으로 상을 차렸다. 탄일다례에도 9촌(약 27㎝) 높이로 총 20기 21종의 많은 제물을 올렸다.

하지만 한식, 단오, 추석, 삭망 등 절기다례 때는 간단하게 제주(술)와 과일, 우포(쇠고기 육포), 식혜, 목면을 각 1기(그릇)씩 올렸다. 낯선 이름인 목면(木麵)은 메밀국수를 말한다. 조선시대 때 밀가루보다 메밀이 더 흔한 식재료였고 이로 국수를 만들어 추석다례에 올린 것이다.

그러니까 조선 왕실의 후궁이자 왕의 생모였던 이가 정성스레 전한 추석 차례상의 기본은 술, 과일, 포, 식혜, 국수 정도였다. 추석 차례 음식 대표로 알려진 송편도 토란탕도 제향발기에선 보이지 않는다.

올 추석엔 조선 왕실의 제향발기 대로 전통주 한 병, 과일 하나, 육포, 식혜 그리고 국수 한 그릇을 조상께 올려보자. 이리 해도 전통에 어긋나지 않는다. 물론 원래 의미대로 온 가족이 즐거운 추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혜경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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