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재 |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인간은 너무 많은 진실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노래했을 때, T. S. 엘리엇은 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있었다. 지난 전쟁은 이 예민한 시인으로 하여금 익숙했던 진실들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주변 사람들은 모순과 복잡함으로 점철된 황무지 같은 진실에 고개를 돌리거나 부인하기 바빴다. 잭 브렘의 ‘심리적 반발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의 신념에 벗어난 사실을 목격하면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을 자유가 침해됐다고 느낀다. 그리고 진실 자체보다 믿고 싶은 것을 믿을 자유를 선택한다. 21세기가 특별한 것은, 이 성향이 최고 권력자로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제도적 삶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익숙한 진실이란 인간 공동체 안에서 일정한 합의를 이룬 사실을 가리킨다. 느닷없이 출현한 전쟁, 양자역학, 인공지능 같은 것들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기존의 합의를 흔들고 새로운 합의를 요구한다. 이 같은 날카로운 경험이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의 영역에 속한다면, 철학과 예술은 새로운 경험 없이도 인간 사이의 합의를 흔들 수 있는 뾰족한 모순을 찾아내곤 한다.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 신애는 신의 말씀을 받들어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도섭을 용서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교도소 면회실에서 마주한 박도섭은 이미 신의 용서를 받았다. 신의 사랑과 구원이 가진 초월성은 피해자의 용서마저도 앞선다는 모순 앞에서 신애의 분노는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그는 가해자 딸의 주변을 맴돌고, 교회 장로를 신에 대한 복수의 제물로 삼는다.
철학자 애그니스 캘러드는 피해자의 분노에서 부인하기 힘든 모순을 본다. 분노란 피해를 극복하고 잘못된 것을 고치려는 열망이기 전에, 피해 자체에 집착하는 마음이다. 피해란 본질적으로 이미 벌어진 것이고, 그만큼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이때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가장 합리적인 수단은 복수뿐이다. 따라서 가해자가 저지른 피해는 사건 자체 이후로도 이어진다. 체념하거나 복수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상태로 피해자를 몰아넣음으로써 도덕적이 될 기회를 박탈하기 때문이다. 신애는 아들을 잃었기 때문에 나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식민지 피해자 또한 같은 도덕적 모순에 처해 있다. 사회학자 조은주와 채오병은 이현세의 ‘남벌’과 가와구치 가이지의 ‘지팡구’에서 “가해자를 처벌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비하 상태로 밀어 넣는 멜랑콜리아”를 본다. 남벌의 주인공 혜성의 멜랑콜리아는 단호하기 그지없다. 남벌에서 식민지 피해란 선악처럼 명징하다. 혜성이 북한과 협력하여 한민족의 완전성을 달성하고, 미국인의 존경을 받으며 후쿠오카에 상륙하는 이야기는, 일본의 가해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되돌려주는 복수의 서사다.
반면 일본의 멜랑콜리아는 기회주의적이다. 지팡구는 미국과의 전쟁 상황을 부각하여, 식민지 가해자로서의 면모를 은폐하고, 급기야는 스스로를 식민지 피해자였던 것으로 변모시키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이 같은 회피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식민지 가해를 여러번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샤자이’(법적 책임을 포함한 사죄)보다 ‘오와비’(마음으로부터의 사죄)라는 표현을 선호해온 건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과 배상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비록 소수지만, 간디와 만델라는 역사상 이 도덕적 모순의 굴레를 벗어났던 비범한 지도자들이다. 이들은 식민지 분노의 도덕적 동기를 인정하면서도, 정의의 완전한 실현에는 걸림돌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더 높은 수준의 문명과 정의에 다다르기 위해 이들은 ‘용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같은 노력이 인간의 분노와 도덕의 본성과 맞닿아 있는지는 아직 논쟁 중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식민지 분노의 모순적 굴레에 빠지지 않고, 미래를 향한 지성과 상상력으로 분투했던 선배들이 있었다. 이들을 기억한다면 100년이 지난 오늘날 친일파 소란은 얼마나 부끄러운가.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남을 시새워 쫓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묵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에 희생된, 불합리하고 부자연에 빠진 이 어그러진 상태를 바로잡아 고쳐서, 자연스럽고 합리로운, 올바르고 떳떳한,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고자 함이로다.”(기미독립선언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