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에 "사골 떡만둣국, 닭강정 어때요?"
"편 가르지 말고, 음식 먹으며 덕담 나누길"
명절 식탁은 민심의 바로미터다. 가족끼리 정치 이야기는 금물이라 했건만, 헌정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구속에 올해 설 잔칫상은 어느 때보다 시끌벅적할 전망이다. 음식은 예로부터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건 갈등을 봉합하고 교류와 화합을 이루는 상징으로 활용됐다. 주요 정상회담 시 오찬과 만찬 메뉴 보도가 빠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암울한 뉴스만 쏟아지는 연초지만 우리의 식탁을 희망차고 화목하게 만들어 줄 명절 음식 없을까.
위기에 빠진 명절 식탁을 구원해줄 적임자를 지난 13일 만났다. 청와대에서 20년 이상 근무하며 역대 대통령 다섯 명의 식사를 책임졌던 천상현(56) 전 청와대 총괄조리팀장(셰프)이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으로 직무가 정지됐을 당시 청와대에 있었다"며 "옛날에는 여야 갈등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천 셰프가 설을 맞아 추천한 음식은 '사골 떡만둣국'과 '논현동 닭강정'. 사골 떡만둣국은 설날의 대표 전통 음식이고, 닭강정은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고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잘 먹었던 음식이라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대통령도 예외 없이 먹은 떡만둣국
음력 설 아침에 떡국을 먹는 건 조선시대부터 변하지 않는 풍습이다. 주재료인 가래떡이 '장수'를, 가래떡을 썰어낸 모양이 '엽전(부)'을 상징해서다.
대통령이라고 예외는 없다. 천 셰프는 "모든 대통령이 설엔 떡국을 먹었다"며 "떡국도 육수와 재료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사골 떡만둣국을 가장 많이 먹었다"고 설명했다. 청와대 떡국은 3, 4일 동안 직접 사골육수를 뽀얗게 우려내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다면 시판 사골육수를 써도 된다. 여기에 "잡채, 갈비찜, 굴비구이, 육전, 동태전, 호박전, 고구마전을 더하는 게 청와대의 평소 설 아침 상차림"이라고 했다. 지역과 취향에 따라 "굴, 매생이, 미역, 다슬기"를 넣기도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떡국에 굴을 넣어 먹는 것을 선호했다.
이명박부터 문재인까지 즐긴 '닭강정'
천 셰프는 최연소, 최장수 청와대 요리사다. 신라호텔 중식 요리사였던 그는 김대중 대통령 임기 중인 1998년 4월 임용돼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을 거쳐 문재인 대통령 임기 중인 2018년 7월 명예퇴직 하기까지 20년간 청와대 식탁을 책임졌다. 20년간 인근 관사에 살면서 매일같이 오전 6시 30분에 출근하는 생활을 했다.
그는 "오랜 기간 삼시 세끼를 해드렸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다"며 "특히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면 밥은 잘 챙겨드시는지 걱정되고 '내가 해드린 음식을 좋아했었는데'라는 생각에 밥 한 끼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최근 그가 낸 책 '대통령의 요리사'에도 대통령들과 음식으로 얽힌 여러 일화가 담겼다.
그는 대통령을 '음식의 간'이나 '좋아하는 음식' 등 입맛으로 기억한다. 대식가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중식과 생선찌개를 즐겨 먹었다. 흑산도 홍어도 좋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일식 스타일이 아닌 경상도식 막회를 자주 찾았다. 숭덩숭덩 썰어낸 회를 참기름과 마늘을 듬뿍 넣은 된장에 찍어 먹는 방식이다. 사골우거지해장국, 소고기국밥 등도 즐겼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소울푸드도 소박했다. 돌솥간장비빔밥이다. 이 전 대통령은 뜨거운 쌀밥에 날계란, 간장, 참기름을 넣고 비비는 게 전부인 음식을 기력이 없을 때마다 찾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까다로울 것 같다는 선입견과 달리 가장 편식이 없었다. 삭힌 홍어도 거리낌 없이 먹고 체력이 떨어지면 양곰탕을 찾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여사는 청와대 요리사들과 자주 소통했다. 천 셰프가 추천한 '논현동 닭강정'은 김 여사의 레시피다. 천 셰프는 이 레시피를 이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박근혜 전 대통령, 문재인 전 대통령 때도 사용했다. 간장 양념에 졸이고 청양고추와 깐마늘 등으로 매운맛을 더해 깔끔하게 완성하는 닭강정을 역대 대통령 모두 즐겼다. 그는 "대통령뿐 아니라 주방 직원들까지 모두가 참 맛있게 잘 먹은 음식"이라고 꼽았다.
청와대 음식 기본은 '안전' '건강'
천 셰프는 "내가 대통령의 정치에 대해 평가할 수는 없고, 인간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이 일요일 아침은 손수 라면을 끓여 먹겠다며 주방 직원들을 나오지 못하게 한 것이나 노 전 대통령의 부인인 권양숙 여사가 '주방 사람들 힘들게 하지 말라'며 밥을 여러 번 차리지 않게 신경 써줬던 데 대해 고마움이 크다.
청와대 주방이라 하면 다들 음식에 특별한 비법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천 셰프는 조리법엔 특별할 게 없다고 했다. 그는 "청와대 음식의 기본은 안전과 건강"이라고 했다. 구체적 비법도 귀띔했다. "식재료는 기본적으로 농약 검사까지 다 깐깐하게 해요. 거기에 튀김 음식을 거의 안 하고 대신 나물을 많이 하고, 조미료 안 쓰고, 좋은 장을 쓰고, 제철 음식을 가급적 자연산으로 공수하는 게 비법이라면 비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