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경성 모습. 조선총독부 왼쪽이 서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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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말기는 '선전의 과잉 시대'였다. 일제가 부쩍 말을 많이 한 때다. 일본과 한국이 왜 하나인지, 내(內)와 선(鮮)이 왜 일체인지, 한국인이 일왕(천황)에게 왜 충성해야 하는지 등등을 귀가 따갑도록 선전한 시기다. 우리에게 충성하라는 잔소리가 심해졌으니 이것도 체제 위기의 증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렵에 일제의 대변자가 되어 언론 기고, 방송, 강연, 좌담 등의 기회에 나팔수 역할을 한 핵심 세력이 전향한 운동권 출신들이다. 민족주의운동이나 항일운동을 했던 이들이 친일 우파로 전향해 그런 활동을 했다.
1990년을 전후한 세계적 탈냉전으로 냉전체제의 권위가 약해지자, 기존의 반공 이론가들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퇴조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와 비슷하게 1919년 3·1운동 이후에도 원조 친일파 혹은 1세대 친일파들이 한층 강해진 대중의 분노 앞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는 경향이 이어졌다. 이처럼 영향력이 약해지는 데다가 이들이 나이를 더 먹었기 때문에,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등이 있었던 1930년대에 일제는 새롭게 수혈한 친일파들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원조 친일파와 달리 2세대 친일파들은 메시지가 너무 많고 현란했다. 한국과 일본은 왜 하나인지, 한일은 왜 협력해야 하는지 등등을 화려한 언어로 선전했다. 1930년대 중후반 이후에 집중적으로 등장한 2세대 친일파들이 너도나도 미사여구를 동원해 징용·위안부·징병 호응을 독려하는 일들이 1940년 전후에는 하나의 현상이 됐다.
1910년 대한제국 멸망을 이뤄낸 1세대 친일파들은 웬만한 일이 아니면 대중 앞에 가급적 나서지 않았다. 을미사변(1895년)과 을사늑약(1905) 등을 거치면서 '친일파=매국노' 이미지가 강해진 것과 무관치 않다. 그런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한 2세대 친일파들은 대중이 모이는 곳에 과감히 나타나, 자신이 과거에 적대했던 일제에 충성해야 할 이유를 대중에게 설명했다.
공산주의 항일투사였던 김한경도 그 같은 일제강점기판 뉴라이트 중 하나다. 한때는 일본까지 건너가 반일운동을 했던 그는 전향 뒤에는 화려한 논리를 앞세워 일제 지배를 합리화하는 선전가로 변신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두 명의 김한경이 등장한다. 이들은 한자 이름도 똑같이 한경(漢卿)이다. 운동권 출신의 김한경은 1902년에 태어났고, 동명이인인 김한경은 1881년에 태어났다.
측량기술자 출신인 1881년생 김한경은 1910년 국권침탈 당시에 29세의 탁지부 토지조사국 기수(技手)였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한경(1881) 편은 이 김한경이 "1912년 8월에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고 알려준다.
복역 중 사상 전향하고 친일주의자로 컴백
한국 강점 1년 반 뒤인 1912년 3월 29일 칙령 제56호로 제정된 한국병합기념장은 대한제국 멸망 이전의 경력이 있어야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3-1권은 "한국병합기념장의 수여 조건을 보면 (1)한국병합 사업에 직접 관여한 자 및 한국병합 사업에 수반한 요무(要務)에 관여한 자, (2)한국병합 당시 조선에 재근한 관리 및 관리대우자, (3)한국정부 관리 및 관리대우자, (4)종전 한일관계에서 공적이 있는 자 등이었다"고 설명한다.
관리의 경우에는 일제 한국통감부 간섭하의 한국 정부에서 근무했고 멸망 당시에 일본을 반대하지 않았어야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을 수 있었다. 1881년생 김한경이 기념장을 받은 것은 강점 이전부터 근무하면서 일본을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일파가 된 계기가 강점 이전 행위에 있었다는 점에서 이 김한경은 1세대 친일파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김한경보다 21년 뒤에 태어나 일제 때 학교를 다닌 이 글의 주인공은 2세대 친일파가 된다.
충북 제천군 봉양면에서 태어난 1902년생 김한경은 보성전문학교 법률과에 입학한 1923년부터 항일운동에 깊이 참여했다. 1924년에는 학생단체 혁청단의 집행위원이 됐다. 그해 7월 10일 자 <조선일보>는 혁청단 강령에 "조선민족 해방의 촉진을 기함"이란 문구가 있다고 보도했다. 민족해방 강령이 공개적으로 드러난 운동단체의 집행위원이 됐으니, 이 정도면 일제에 대해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4권 김한경 편에 따르면, 1926년 8월에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된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일본에 가서도 학업보다 항일운동에 더 매진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지 2년이 안 된 1928년 2월에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책임비서가 된 일은 그가 항일운동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를 반영한다.
<친일인명사전>은 대한제국 멸망 18주년인 1928년 8월의 일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같은 해 8월 국치기념일 격문 살포와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고 설명한다. 적지에 가서 격문을 배포하고 시위를 주도했으니 상당히 대담했다고 볼 수 있다.
1931년에 도쿄지방재판소가 선고하고 2년 뒤 최고법원인 대심원이 확정한 형량은 징역 6년이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형량이 징역 3년 이하였던 점, 지식인인 사상범들에게는 징역형을 짧게 선고했던 점 등을 감안하면, 일본 법관들의 눈에 그가 상당히 위험한 인물로 비쳐졌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위험시한 일본 법관들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오판이었다. <친일인명사전>은 "복역 중에 사상전향했다"고 기술한다. 그로부터 얼마 뒤 그는 민족해방주의자가 아닌 친일주의자로 컴백한다. 1938년 이후로 전 조선 차원의 전향자 단체인 시국대응전선(全鮮)사상보국연맹 간사, 친일 관변단체인 국민문화연구소의 전무이사, 친일 언론사인 동양지광사의 편집부장 등으로 맹렬히 활동한다.
그가 어느 정도나 변신했는지는 1939년 연말에 일본군 전사자 위령사업에 50원을 기부할 때 했던 발언에서도 나타난다. 위 진상규명보고서에 인용된 친일단체 중앙협화회 자료에 따르면, 그를 포함한 네 명은 기부금을 내면서 "소생들은 기왕의 조선공산당 간부로서 혹은 독립운동의 투사로서 반일본적 운동을 감행한 반역의 무리였습니다"라며 "소아병적 사상을 결(潔)히 청산"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들 4명이 낸 돈은 1인당 12.5원이다. 그해 2월 24일 자 <조선일보>는 "요즘 보통 식모의 월급은 조선 가정엔 오륙원, 내지 가정엔 십원 가량"이라고 보도했다. 12.5원은 한국에서는 가사도우미를 2명, 일본에서는 1명 고용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적지 않은 돈을 내면서 자기 영혼까지 내던지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일제 침략전쟁 미화하며 맹렬한 친일파로
예전의 자신을 반역의 무리로 폄하한 김한경은 '반국가세력'에 대한 적대 활동에도 가담했다. <친일인명사전>은 그가 상임간사로 부역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결의 사항 중 하나가 "아등(我等)은 사상·국방 전선에서 반국가적 사상을 파쇄·격멸하는 육탄적 전사가 될 것을 기함"이었다. 옛 동지들을 적대하는 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위에서, 일제 막판의 친일파들은 말이 많고 현란했다고 언급했다. 김한경에게서도 그런 면이 나타났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939년 2월호 <동양지광>에 실린 '동양문화와 일본정신'에서 그는 "일본은 동양 문화의 순난기에는 유일한 보존자이고 부흥기에는 광휘로운 지도자이다"라며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은 일본 문화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과정이라고 해석했다.
동양문화의 암흑기가 있었다고 했다. 그 시기에 일본이 동양문명을 보존했다고 했다. 그렇게 보존된 문명이 1939년 현재의 세계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중국을 꺾고 동·서양을 아우르게 된 19세기 후반의 서유럽은 유럽 문명의 모체인 그리스·로마 문명이 중세 암흑기를 지난 뒤 르네상스를 계기로 유럽 전역에 영향을 주고 나아가 세계사에까지 영향을 주게 됐다는 식으로 서술했다.
김한경의 학창 시절은 그런 설명법이 동양인들에게 한창 소개될 때였다. 동양문화에 순난기가 있었고 그 시기에 동양문명을 보존한 나라가 있었다는 설명은 19세기 후반 서유럽인들의 역사인식을 연상시킨다. 김한경 같은 2세대 친일파들이 활동한 일제 말기에는 이런 식의 설명법이 한국 대중의 눈과 귀를 흐리게 했다. 일방적 선전의 과잉 시대였던 것이다.
김한경은 늦어도 1938년부터는 친일적인 글을 쓰거나 친일단체 혹은 친일 언론사의 상근 간부로 활동했다. 1939년에 한국 가사도우미 월급 2개월치를 일제에 기부한 데서도 나타나듯이 이 같은 친일활동은 어느 정도의 친일 수익을 발생시켰다.
한때는 민족해방을 추구했던 김한경은 그렇게 최소한 7년간 친일재산을 기반으로 일제 침략전쟁을 미화하며 맹렬한 친일파로 살았다.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는 그의 해방 이후 활동과 사망 연도는 설명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