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는 26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여야가 합의해 안을 제출할 때까지 헌법재판관 임명을 보류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은 안정적 국정 운영에 전념하되, 헌법기관 임명을 포함한 대통령의 중대한 고유 권한 행사는 자제하라는 것이 우리 헌법과 법률에 담긴 일관된 정신”이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 직무가 정지돼 권한을 대행하고 있지만, 국가원수의 고유 권한인 헌법기관 임명권을 대행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한 대행은 담화에서 “(권한대행이) 불가피하게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면, 국회에서 여야 합의가 먼저 이뤄지는 것이 헌정사에서 한 번도 깨진 적 없는 관례”라고 했다. 한 대행은 “우리 역사에서 여야 합의 없이 임명된 헌법재판관은 한 사람도 없었다”면서 “황교안 전 대행 역시 헌재의 탄핵 심판 결정에 영향을 주는 임명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헌재 결정 전에는 헌법재판관 임명을 하지 않았고, 헌재 결정이 나온 뒤 임명했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당시 황교안 권한대행은 2017년 1월 말 퇴임한 박한철 재판관의 후임을 임명하지 않았다. 박 재판관은 ‘대통령 몫’이라 그 후임을 임명하는 것은 권한대행의 재량 범위 밖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결국 헌재는 박 재판관 후임이 없는 ‘8인 재판관’ 체제로 탄핵 심리를 진행해 그해 3월 결정을 선고했다.
한 대행은 처음엔 국회 선출 헌법재판관 후보자 3명을 임명할 생각도 있었다고 한다. 여야가 처음엔 큰 이견 없이 후보자 3인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지난 17일 국민의힘 권성동 당대표 권한대행이 “대통령 탄핵안이 헌법재판소에서 인용되기 전까지는 권한대행의 헌법재판관 임명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나오면서 한 대행이 원점에서 관련 법리 검토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 대행에겐 여야 양측에서 다양한 압박이 들어갔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에서는 “헌법재판관을 임명하지 않으면 탄핵할 뿐 아니라 각종 혐의로 수사를 받게 하겠다”는 압박이 있었다고 정부 관계자는 전했다. 반면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형사사건 재판 선고 전에 대선이 치러지지 않도록 최대한 버텨 달라”는 여권 인사들의 요구도 있었다고 한다. 헌법재판관 3인 임명 이후 윤 대통령 탄핵이 헌재에서 인용될 경우 “대통령 권한대행이 윤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았다”는 윤 대통령 지지층의 비난이 제기될 수 있다는 점도 고민이 됐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고심을 이어가던 한 대행은 “대통령 권한대행이 여야의 정치적 합의 없는 정치적 결단을 내리는 것은 헌정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여야 정치권이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결정하라고 한 대행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드는 것은 헌법이 정한 권한대행 역할에서 벗어난다고 봤다는 것이다. 한 대행은 이날 “여야가 합의하면 헌법재판관을 즉시 임명하겠다”고 한 것도 이런 차원이란 것이다.
☞헌재 9인 체제
헌법에 따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9인으로 구성된다. 대통령이 9명을 모두 임명하며 이 가운데 3명은 국회가 선출한 사람을, 3명은 대법원장이 지명한 사람을 임명한다. 지난 10월 국회 선출 몫인 재판관 3명이 퇴임한 후 여야 이견으로 후임자가 선출되지 않아 두 달 넘게 6인 체제로 운영돼왔다. 대통령 탄핵 인용 결정을 할 때는 재판관 6인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