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칼럼] 운동권 잔당 정청래는 왜 빌런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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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8.26. 오후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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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향배를 읽는 그의 안목은 탁월했다…
임종석·송갑석 등 운동권 본류들이 공천 학살당해도
그가 살아남은 비결이었다



이재명민주당 대표 후보와 정청래 법사위원장이 25일 국회 본회의에서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 /뉴시스

개원 즉시 전면전이 벌어진 22대 국회에서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 민주당 4선 정청래 의원이다. 이재명 전 대표의 호위 무사를 자처하는 그는 법사위원장에 기용되자마자 법사위를 화약 연기 자욱한 정권 공격의 전투 현장으로 만들었다. 국회 상임위를 탄핵 분위기 띄우고 검찰 겁박하는 무대로 활용하면서 이 전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방어하는 방탄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정 위원장이 논란을 부른 것은 그의 거침없는 폭주 때문이다. 합의의 관행, 품격과 절제 따위는 개나 주라는 식의 일방적 회의 운영으로 법사위를 매번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다. 증인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리고 인격을 후벼 파는가 하면 동료 의원에게까지 독설을 퍼부으며 22대 국회 최고의 뉴스 메이커로 떠올랐다.

법사위원장으로서 그의 행태는 질서 파괴자에 가깝다. 국회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쌓아온 관행의 규범을 무너트리고 내 맘대로 한다는 식의 독주를 거듭하고 있다. 여야 간사 선임조차 건너뛴 채 방송3법을 통과시키고, 위법 논란을 뭉개며 대통령 탄핵용 청문회를 강행했다. 국민 청원을 이유로 청문회를 여는 것부터 의정 사상 처음이다. 대중 압력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청원인 요건을 채워도 자제하던 그간의 관행을 하루아침에 뒤집었다.

그의 언동은 저질 시비를 부를 만큼 고압적이고 폭력적이다. 증인을 윽박지르고 호통치고 인격적 모욕을 서슴지 않고 있다. 증인들이 반박하면 “위원장이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토 달지 말고”라거나 “어디서 그런 버릇을 배웠냐”는 식의 막말을 퍼부었다. 태도가 불성실하다며 회의실 밖 복도로 ‘10분간 퇴장’ 명령까지 내렸다. 교사가 초등학생 벌주는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국회 갑질이 심하다지만 구악도 이런 구악이 없었다.

언어 폭력은 동료 의원에게까지 향했다. 여당 간사가 의사 일정 문제를 제기하자 “성함이 어떻게 되냐”며 시비 걸고, 기가 막혀 쳐다보는 의원에겐 “왜 째려보냐”며 발언권 정지로 협박했다. 여당 의원이 “존경하고픈 정청래 위원장”이라고 부르자 국회법을 들먹이며 “주의·경고나 퇴장도 시킬 수 있다”고 엄포 놓았다. 어쩌다 완장 찬 소아(小兒)가 칼을 휘두르고 싶어 안달 난 모습 같았다. 유치하고 치졸했다.

상식을 넘는 그의 폭주는 운동권 경력과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가 몸담았던 1980년대 학생 운동권은 권위주의적이고 폭압적인 분위기가 지배했다. 상대를 악으로 모는 이분론, 나만 옳다는 정의의 독점, 독단적이고 과격한 폭력성 등으로 특징되는 ‘운동권 DNA’가 정치에 입문한 86 세대에게 고스란히 전수됐다.

그것은 정청래뿐 아니라 대부분의 운동권 정치인들이 마찬가지였다. 그중에서도 정청래가 독특한 것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 없었다는 점이다. 다른 86 정치인들이 연륜을 더해가며 청년기의 치기(稚氣)를 덜어냈지만 정청래는 4선이 되어서도 80년대식 거친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건국대 84학번 정청래의 ‘훈장’은 1989년 미 대사관저 점거 사건이었다. 다른 대학생 5명과 함께 관저로 진입해 방화를 시도했다가 50분 만에 검거돼 징역 4년형을 받았다. 상급 조직인 서총련 투쟁국 지시에 따라 행동대 역할을 한 것이었다. 그는 운동권 주류는 아니었다. 전대협·한총련 간부 출신이 즐비한 정치권에서도 ‘건국대 조국통일위원장’ 명함은 높은 서열이 아니었다. 하지만 운동권 기질은 어느 86 정치인보다 강렬했다.

정청래는 피아를 갈라쳐 때리는 진영 싸움의 선수였다. 좌우, 여야로 맞선 이슈에선 늘 선봉에 서서 화력을 과시했다. 정청래 하면 거친 독설과 막말, 고함과 의사(議事) 방해부터 떠오르는 싸움닭 이미지였다. 그렇다고 신념과 가치를 중시하는 이념가는 아니었다. 자기 지역구에 서민용 공공 임대주택을 지으려는 것을 막아섰다는 일화가 그의 스타일을 상징해주었다. 가치보다 눈앞의 당선이 우선이란 뜻이었다.

권력 향배를 읽어내는 그의 안목은 탁월했다. ‘노사모’에서 출발한 정치 이력은 친(親)문재인을 거쳐 이재명에 줄 서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재명 자서전을 “흐느끼며 읽었다” 하고 이 전 대표를 “손흥민” “민주당의 깃발”에 비유하며 친위대 대열에 끼었다. 이 전 대표가 피습 당하자 “수술은 잘하는 병원에서 해야 될 것”이라며 서울대 이송을 옹호한 것도 그였다. 임종석·송갑석 같은 전대협 출신 주류들이 줄줄이 공천 학살 당하는 와중에서도 ‘운동권 잔당(殘黨)’인 그가 살아남은 비결이었다.

그가 지금 좌충우돌하는 것도 계산된 정치 처세술일 것이다. 그렇게 해야 이재명 전 대표의 신임을 얻고 정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의 폭주에 ‘개딸’들은 환호하지만 많은 국민은 의회 민주주의를 조롱하는 악당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다. 지금껏 보지 못한 최강의 ‘국회 빌런(영화 등의 악역)’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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