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1세
에드워드 1세
Edward 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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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국왕 | |
아키텐 공작 | |
아일랜드 영주 | |
재위 | 1272년 11월 16일-1307년 7월 7일 |
대관식 | 1274년 8월 19일 |
전임 | 헨리 3세 |
후임 | 에드워드 2세 |
가스코뉴 공작 | |
재위 | 1249년–1307년 |
전임 | 헨리 3세 |
후임 | 에드워드 2세 |
퐁티외 백작 | |
재위 | 1279년–1290년 |
전임 | 잔 드 다마르탱 |
공동재위자 | 엘레오노르 드 퐁티외 여백작 |
후임 | 에드워드 2세 |
이름 | |
별호 | 긴다리왕 (Longshanks) 스코트인 잡는 망치 (Hammer of the Scots) |
신상정보 | |
출생일 | 1239년 6월 17일 |
출생지 |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 |
사망일 | 1307년 7월 7일 (68세) |
사망지 | 컴벌랜드 브러프바이샌즈 |
왕조 | 플랜태저넷 |
부친 | 헨리 3세 |
모친 | 엘레오노르 드 프로방스 백작영애 |
배우자 | 레오노르 데 카스티야 왕녀(1254–1290) 마르그리트 드 프랑스 왕녀 (1299–1307) |
자녀 |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묘소 | 웨스트민스터 사원 |
군사 경력 | |
주요 참전 | 제2차 남작 전쟁 |
에드워드 1세(영어: Edward I, 1239년 6월 17일 ~ 1307년 7월 7일, 재위 1272년 11월 16일 ~ 1307년 7월 7일)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잉글랜드 왕으로 키가 188 cm여서 ‘다리 긴 왕(Longshanks)’으로 알려져 있다. 생애 동안 웨일스와 스코틀랜드를 정복해 다스렸다.
헨리 3세의 장자로, 노르만 정복 이래 잉글랜드 최초의 국민적인 왕이라 불린다. 왕세자 시절에 가스코뉴와 아일랜드의 영주로서 활약했으며, 1258년∼1265년의 내란에는 부왕을 도왔다. 1265년 시몽 드 몽포르를 격파하는 데에 공을 세우고 1271년 십자군에 참가, 부왕의 사후 원정 중에 왕으로 선출되어, 1274년에 귀국하여 대관하였다.
아버지 헨리 3세 때부터 있어 온 외국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책을 썼다.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토지 등 부동산의 양도 및 상속에 관한 중요한 법률을 만들어 '잉글랜드의 유스티니아누스'라 불리었다. 재판 행정 제도를 확립하고 일련의 제정법을 발포, 봉건사회의 질서 유지에 노력하였다. 또 산업에 주력하고 1285년 상인법을 발령, 양모와 가스코뉴의 술 생산을 장려하였다.
그는 프랑스 왕에게 신종하여 대륙에 있어서 나바라, 카스티야의 왕위계승문제, 아라곤의 국왕 페로 3세와 교황·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의 조정(1291)에 활약이 컸다. 1295년 성직자와 귀족, 각주에서 2명의 기사 및 도시의 대표를 모아 '모범 의회'를 열어 잉글랜드 의회의 기초를 쌓았다. 말년에 프랑스의 필리프 4세의 가스코뉴, 플랑드르 공격을 받아 1303년 파리 협정에서 타협을 보았다. 그러나 또 스코틀랜드의 반란으로 인한 막대한 전비 조달 때문에 국내의 반란을 유발하였다.
그는 1307년 그가 정복하였던 스코틀랜드가 로버트 1세를 중심으로 독립하자 이를 정벌하기 위하여 병력을 이끌고 진군하던 도중 그해 7월 7일 칼라일 근방에서 장남 웨일스 공 에드워드를 불러 “나를 화장하여 뼈를 가죽 부대에 넣어 군사들과 함께 진군하라. 그리고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장악했을 때 묻어 달라”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사망하였다.[1]
각주
[편집]- ↑ 미셸 드 몽테뉴(1580), 《수상록》, Traduction Michaud. Firmin Didot, 1907 〈Livre I/Chapitre 3〉“Édouard premier, roi d'Angleterre, ayant constaté dans ses longues guerres contre Robert, roi d'Écosse, combien sa présence contribuait à ses succès, la victoire lui demeurant partout où il se trouvait en personne ; sur le point de rendre le dernier soupir, obligea son fils, par un serment solennel, à faire, une fois mort, bouillir son corps ; pour que, les chairs se séparant des os, il enterrât celles-là et transportât ceux-ci avec lui à l'armée, chaque fois qu'il marcherait contre les Écossais ; comme si la destinée avait fatalement attaché la victoire à la présence de ses ossements.”; 손우성(孫宇聲) 역 (1983), 학원출판공사(學園出版公社), 34쪽. “영국의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란드의 로버트 왕과의 사이에 일어난 오랜 전쟁에서, 자기가 몸소 출전(出戰)했을 때에는 늘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자기가 직접 지휘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사실을 경험하고는, 죽은 뒤에도 자기의 시체를 삶아서 살과 뼈를 갈라, 살은 묻고 뼈는 잘 보관해 두었다가, 스코틀란드 군과의 대전(對戰) 때에 이 유골(遺骨)을 가지고 출정(出征)하라고 자기 아들에게 엄숙히 맹세시켰다.”
참고 자료
[편집]외부 링크
[편집]전임 헨리 3세 |
잉글랜드의 왕 아일랜드의 영주 아키텐 공작 1272년 – 1307년 |
후임 에드워드 2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