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광복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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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대한민국 |
형태 | 공휴일 |
중요도 | 일본으로부터 해방함 |
시작 | 1945년 |
날짜 | 8월 15일 |
빈도 | 매년 |
축제 | 경축 행사 |
행사 | 일제로부터의 해방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념 |
관련 | 대일 전승 기념일, 삼일절,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 |
광복절(光復節, National Liberation Day of Korea)은 한반도가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로,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국경일 및 공휴일로 법제화함으로써 매년 양력 8월 15일에 기념하고 있다. 해방년도인 1945년을 광복절 원년으로 계산한다.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대한 법률〉에 따라 국경일 및 공휴일로 지정되어 대한민국에서는 전국적으로 각종 경축 행사가 거행되며, 공공기관, 가정에서는 태극기를 달아 기념하기도 한다.[1]
전개
8월 15일
해방 직후 미국과 소련을 통해 전개된 군정에 따라 구 대한제국 지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과 공산주의 체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었으며, 이후 양측 모두 이 날을 기념하지만 구체적인 의미가 크게 다르다. 대한민국에서는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고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과정을 아울러 광복으로 명명하여 기념하고 있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국 해방의 날(祖國 解放-)이라 한다.
전세가 연합군 측에 유리하게 되어, 1943년 11월 말에 미국·영국·중화민국 3국은 소위 카이로 선언을 발표했다. 이어 1945년 5월에 나치 독일이 항복하였고, 8월 8일에는 미국과 영국, 소비에트 연방이 모여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청진시에서는 아직까지도 소련과 일본이 서로 치열한 전투를 계속 하고 있었다. 한민족은 카이로 선언과 그것이 다시 확인된 포츠담 선언으로, 그리고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정치범과 경제범을 석방되어 여운형이 연설한 해방집회를 하였으며, 한민족의 오랜 투쟁을 통한 민족의 극복으로 일제의 학정으로부터 8월 17일까지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경술국치를 재확인하여 결국 일본과 단절되었다.
그날 아침 여운형은 엔도 류사쿠와 교섭을 벌여 5개 조항을 요구했고 이를 관철하였다.
- 전국적으로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 서울의 3개월분 식량을 확보할 것.
- 치안 유지와 건국 운동을 위한 정치 운동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 학생과 청년을 조직, 훈련하는 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데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그날 정오에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방송이 라디오로 중계되었다.
물론 그날 중대 발표가 있으니 조선인들은 경청하라는 벽보가 나붙었으나 당시 라디오를 가진 조선인들은 많지 않았고,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발표 방송은 잡음이 심했고 어려운 한자가 섞여 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이게 그 당시 쓰던 일본어도 아니고 일본 황족어로 나왔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였다. 그러나 라디오로 방송된 문장과 개요가 당일의 신문에 기재되고 있었으므로, 일본 국민의 거의 대부분이 패전을 이해했으며 한민족은 거의 조선(대한)독립만세 시위가 없었으며, 여운형이 조국의해방집회를 연설했다.
그 사이에 소련은 일본 제국과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전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얘기상 8월 15일 여운형과 문제안이 서로 전화하고 대화하면서 그 과정에 오후 4시 30분쯤에 조선에서 최초의 안재홍과 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는 말도 있다[2].
8월 16일
다음날 아침이 되자 비로소 조항 내용대로 형무소에 있었던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되기 시작했다. 그때야 경성(서울) 시민들은 어제 방송이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방송인 줄 알게 되었고, 해방을 환호하기 시작했다. 한편, 함경북도 청진시에는 여전히 소련이 일본 제국과의 전투는 계속되었고, 사실상 초저녁이 되어서야 비로소 청진 전투가 끝났다. 그리고, 그대로 해방된 시민들은 계동에 있는 여운형의 집에 몰려가 연설을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여운형은 집 바로 뒤에 있는 휘문중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해방을 맞이하는 연설을 한다.[3]
“ | 조선 민족의 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에 원등(엔도 류사쿠)이가 나를 불러가지고 '과거 두 민족이 합하였던 것이 조선에게 잘못됐던가는 다시 말하고 싶지 않다. 오늘날 나누는 때에 서로 좋게 나누는 것이 좋겠다. 오해로 피를 흘리고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민중을 지도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나는 다섯 가지 조건을 요구하였다. 우리 민족해방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 이상적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는 개인적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머지않아 연합군 군대가 입성할 터이며, 그들이 오면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럼이 없이 하자.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시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는 통쾌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에 대하여 우리들의 아량을 보이자. |
” |
그런데 연설 도중에 '소련군이 서울역에 온다'는 소문이 나돌자 수많은 시민이 연설 도중 청중들 사이에서 고함을 외쳤다. 청중의 일각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여운형은 연설을 이어나갔으나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은 순식간에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이에 흥분한 군중의 일부가 아우성치면서 교문 밖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여운형의 이날 연설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래서 기록으로 전하는 연설문도 반 토막뿐이다. 연설이 중단된 원인은 흔히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 때문이었던 것으로만 알려졌으나 실상은 조선사람들의 습격을 두려워한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전향자들을 동원해서 벌였던 공작이었다.[4][5]
곧 여운형은 기존에 자신이 1944년 8월에 결성하여 운영했던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을 기본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하였고 YMCA 건물에서 건준 강령을 발표하였다.
-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의 건설을 기함.
-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8월 17일
구 경성역 앞에서 한민족이 제작한 태극모양을 바로 세워 3,5,4,6로 괘를 구성한 태극기를 만든 이후 태극기와 함께 들고 해방을 맞이하였으며, 일제의 공공기관 건물의유리창에 돌을 던져 파손하며 독립만세 시위를 완수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상황
해방소식을 듣자 반일인사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했던 친일경찰들은 도망가기 바빴으며,[6] 일본군들은 미군에 의해 무장해제되는 9월 9일까지 시내를 돌아다니며 해방을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 비행기로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건국준비위원회 명의의 전단을 뿌렸다.[7]
한편 건국준비위원회는 8월 말까지 전국에 145개 지부를 두고 일본인 자본가와 지주로부터 재산과 토지를 접수하여 조선인들에게 배분하는 것을 도와주었으며, 경찰들이 도망간 빈자리를 대신하여 전국의 뜻있는 청년들을 모집해 치안대를 결성해 치안을 유지하였다. 여기서 지방의 경우는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 이념을 떠나서 지방의 유력한 유지들과 지주들 역시 적극적으로 나서서 건준에 활동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그러나 가혹한 압제로부터의 돌연한 광복은 과격한 흥분상태를 가져왔고 수많은 정당과 사회단체가 통일적 핵심체 없이 난립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곧 귀국하여 정권을 담당할 것을 기대하는 송진우 계통과 연합군이 진주할 때까지 민족대표기관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여운형 계통과의 행동이 분열된 것이다. 이리하여 여운형 계통에서는 안재홍을 비롯한 일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로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이때 잔류한 좌익세력은 소위 인민공화국이라는 정권조직을 급조하여 한민당과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던 충칭의 임시정부와 대립할 기세를 취했다.
한편, 해외에서 독립운동 활동한 한국광복군은 미군첩보부대 OSS와 함께 국내 진입작전을 추진하던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등 4명의 광복군 요원이 1945년 8월 18일 낮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하면서 해방된 조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무장한 채 여의도에 착륙한 이들은 미군이 "휴전조약이 체결된 다음에 다시 오라."는 일본군의 협박에 굴복하는 바람에 다음날 오후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광복군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11월이 되어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8]
국내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대립이 첨예해갈 때에 미·소 양군이 각기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삼아 남북으로 갈라서 1945년 9월 한반도에 진출했다. 남북한을 분할한 미·소 양군은 점령 지역에 군정을 실시하였다. 소련은 처음 조만식을 내세워 인민위원회를 조직게 하고 군정 하의 행정을 담당케 하였으나, 이어 김일성(金日成)을 위원장으로 하는 소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 공산주의 정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한편 남한에 진주한 미군도 군정청을 설치하고 남한의 모든 행정을 담당하였다. 미 군정은 정치활동의 자유를 허용하여 모든 한국인 정당에 대한 절대 중립 태도를 언명했다. 그리하여 송진우 등은 '한국민주당', 안재홍 등의 '국민당', 여운형 등의 '조선인민당', 박헌영(朴憲永) 등의 '조선공산당'을 위시한 50여 개의 정당이 난립하였다.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이 귀국하고, 중국과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도 귀국하였으나 혼란은 여전하였다.
1949년 5월 24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3·1절(3월 1일), 헌법공포기념일(7월 17일), 독립기념일(8월 15일), 개천절(10월 3일)을 4대 국경일로 하는 안건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하였고,[9]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제정 과정을 거치면서 헌법공포일을 제헌절로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수정하였다. 같은 해 9월 21일, 해당 수정안이 제5회 국회본회의에서 통과되었으며, 1949년 10월 1일에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 및 공포되었다.[10] 이에 광복절은 법률에 의하여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같이 보기
각주
- ↑ 일본식 용어, 이것만은 고치자 2010/03/29 장애인뉴스
- ↑ 생생한 증언과 영상을 통해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1945년 8월 15일 그날의 기억 | 광복 60년 특별기획 (KBS 050809 방송) 2021.8.9
- ↑ 1945 08 15 그날 무슨 일이 …③
- ↑ 이정식 교수 (1991년 8월). “8.5 미스터리”. 《신동아》: 430-437.
- ↑ 1945 08 15 그날 무슨 일이
- ↑ 서중석. 《지배자의 나라/민중의 나라》.
이들 친일경찰 세력들은 1945년 9월 초순, 미 24군단이 한반도 입성해서 군정을 선포했을 때, 군정청 경찰로 대거 채용된다.
- ↑ 1945 08 15 그날 무슨 일이 … ④
- ↑ “환희와 좌절이 교차한 해방의 공간들”. 2010년 8월 2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8월 23일에 확인함.
- ↑ 〈동아일보〉 1949년 5월 27일
- ↑ 대한민국 법률 제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