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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헌'''(申櫶, [[1810년]] ~ [[1888년]])은 [[조선]] 말의 무신이자 외교관이다. 자는 국빈(國賓), 호는 위당(威堂), 시호는 장숙(壯肅)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원래 이름은 '''신관호'''(申觀浩)였으나 후에 개명했다. [[신정희]]의 아버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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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에 금영대장이 되었으나 얼마되지 않아 파직, 유배되었다가 [[1857년]]에 풀려난 후, [[1866년]] [[병인양요]] 때 총융사가 되어 [[강화도]] 염창(鹽倉)을 수비하였다. 그 뒤 [[1874년]] 진무사 훈련대장에 임명되어 지냈다. 이어 강화도 연안에 포대를 구축했다. [[1876년]]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자 판중추부사로서 [[일본]]의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였다. [[1882년]]에는 [[미국]]의 [[슈펠트]]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
[[1849년]]에 금영대장이 되었으나 얼마되지 않아 파직, 유배되었다가 [[1857년]]에 풀려난 후, [[1866년]] [[병인양요]] 때 총융사가 되어 [[강화도]] 염창(鹽倉)을 수비하였다. 그 뒤 [[1874년]] 진무사 훈련대장에 임명되어 지냈다. 이어 강화도 연안에 포대를 구축했다. [[1876년]]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자 판중추부사로서 [[일본]]의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였다. [[1882년]]에는 [[미국]]의 [[슈펠트]]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
2012년 10월 13일 (토) 22:25 판
신헌(申櫶, 1810년 ~ 1888년)은 조선 말의 무신이자 외교관이다. 자는 국빈(國賓), 호는 위당(威堂), 시호는 장숙(壯肅)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원래 이름은 신관호(申觀浩)였으나 후에 개명했다. 신정희의 아버지이다.
생애
정약용의 민간자위전법인 민보방위론을 계승, 발전시켜 『민보집설(民堡輯說) · 융서촬요』등과 같은 병서를 저술, 자신의 국방론을 집대성시켰다. 김정희로부터 금석학, 시도, 서예등을 배워 예서(隸書)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지리학에도 관심이 높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제작에 조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유산필기 라는 역사지리서를 편찬하였다. 불교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농법에도 관심을 가져『농축회통』이라는 농서를 저술하였다.
활동
1849년에 금영대장이 되었으나 얼마되지 않아 파직, 유배되었다가 1857년에 풀려난 후, 1866년 병인양요 때 총융사가 되어 강화도 염창(鹽倉)을 수비하였다. 그 뒤 1874년 진무사 훈련대장에 임명되어 지냈다. 이어 강화도 연안에 포대를 구축했다. 1876년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자 판중추부사로서 일본의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였다. 1882년에는 미국의 슈펠트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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