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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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7일 (일) 17:50 판
독일 연방공화국 | |||
---|---|---|---|
Bundesrepublik Deutschland | |||
| |||
국가 | 독일인의 노래[a] | ||
수도 | 베를린[b] 북위 52° 30′ 02″ 동경 13° 23′ 56″ / 북위 52.500556° 동경 13.398889° | ||
정치 | |||
정치체제 | 연방제, 단원제[c], 공화제, 의원내각제 | ||
연방대통령 연방총리 연방상원 의장 연방의회 의장 연방헌법법원장 |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올라프 숄츠 마누엘라 슈베지히 바르벨 바스 스테판 하르바스 | ||
입법부 | 독일 연방의회 독일 연방상원[c] | ||
집권여당 | 연립정부 사회민주당 동맹 90/녹색당 자유민주당 | ||
역사 | |||
분할 통치 | |||
• 연합군 점령하 독일 | 1945년 6월 5일 | ||
• 독일연방공화국 수립 | 1949년 5월 23일 | ||
• 독일의 재통일 | 1990년 10월 3일 | ||
지리 | |||
면적 | 357,022km2[3] (63 위) | ||
내수면 비율 | 2.416% | ||
시간대 | CET (UTC+1) | ||
DST | CEST (UTC+2) | ||
인문 | |||
공용어 | 독일어[d] | ||
데모님 | 독일인 | ||
인구 | |||
2023년 어림 | 84,607,016[5] (19위) | ||
인구 밀도 | 236명/km2 (58위) | ||
경제 | |||
GDP(PPP) | 2023년 어림값 | ||
• 전체 | $5조 5370억[6] (5위) | ||
• 일인당 | $66,037[6] (19위) | ||
GDP(명목) | 2023년 어림값 | ||
• 전체 | $4조 4620억[6] (3위) | ||
• 일인당 | $52,823[6] (21위) | ||
HDI | 0.942[7] (9위, 2021년 조사) | ||
통화 | 유로[e] (EUR) | ||
종교 | |||
종교 | 가톨릭교회(24.8%) 개신교(22.6%) 동방 정교회(2.2%) 그 외의 기독교(1.1%) 이슬람교(3.7%) 그 외의 종교(1.7%) 무종교(43.8%)[8][9] | ||
기타 | |||
ISO 3166-1 | 276, DE, DEU | ||
도메인 | .de | ||
국제 전화 | +49 |
독일연방공화국(독일어: Bundesrepublik Deutschland 분데스레푸블리크 도이칠란트[*]), 약칭 독일(독일어: Deutschland 도이칠란트[*], 듣기 (도움말·정보))은 중앙유럽에 있는 나라이다. 북쪽으로 덴마크와 북해, 발트해, 동쪽으로 폴란드와 체코, 남쪽으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서쪽으로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독일 영토는 357,021 km²이며, 기후는 주로 온대 기후를 보인다. 인구는 2011년 기준 80,219,695명으로[10] 유럽 연합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이며, 이민자 인구는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11] 공용어는 독일어이고, 소수 민족어나 러시아어, 영어, 소르브어, 덴마크어, 프리지아어도 쓰인다.
주요 도시는 베를린(수도), 뮌헨,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쾰른,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등이 있다. 고대에 여러 게르만족이 살던 독일 땅은 게르마니아로 알려져 있었으며, 100년 이전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10세기부터 게르만족의 땅은 1806년까지 존속한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부를 이루었다. 16세기에 북독일은 루터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된 종교 개혁(Reformation)의 핵심부로 자리 잡았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에 독일은 최초로 통일을 이루어 근대적인 국민 국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9년에 독일은 연합군 점령지 경계선을 따라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으나, 1990년에 통일되었다. 독일은 연방제와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공화국으로 16개 주로 이루어져 있다. 수도는 국내 최대 도시인 베를린이다. 이 나라는 유엔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 G7, G20, 경제 협력 개발 기구, 세계 무역 기구, 유럽 연합의 회원국이다. 독일은 오늘날 유럽 최강대국으로 명목 국내총생산 기준으로 세계 4위의 경제 대국이며,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는 세계 5위이다. 수출과 수입 규모는 세계 2위이다. 연간 개발 원조액은 세계 2위이며,[12] 군비 지출액은 6위를 보인다.[13] 독일은 생활수준이 높으며 광범위한 사회 보장 제도를 이룬 나라이다. 또 독일은 여러 과학 기술 분야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독일 연구소는 전 세계 연구소 중에서 과학기술이 세계 1위이다.[14] 대졸자 초봉은 2012년 기준으로 약 35,000유로(한화 약 4,673만원)로, G7 국가들 가운데 두 번째로 높다. 독일은 크게 발전한 국가로, 세계에서 4번째, 유럽에서 가장 큰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다.
국명
독일을 가리키는 명칭은 유럽의 그 어느 나라보다 다양하다. 예를 들어 독일 내에서 헌법상이나 외교 관계 등에서 사용하는 자국어 표기는 도이칠란트(Deutschland)이지만, 영어로는 '저머니'(Germany)라고 하며 프랑스어로는 '알마뉴'(Allemagne), 폴란드어로는 '니엠치'(Niemcy), 중국어로는 '더궈'(德国)라고 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쓰이는 독일이라는 한국어 명칭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식 한자 음차 표기인 '도이쓰'(일본어: 独逸)[15]를 받아들여 이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며, 그 전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덕국(德國)이라 불렀다. 해방 후에는 일제 강점기의 잔재를 없애고 독일어 원발음에 좀더 가깝게 하기 위해 도이칠란트로 표기하기도 했으나 대한민국에서는 이 표기법이 정착하지 못하였고,[16][17] 현재는 대한민국 주재 대사관에서도 스스로를 '주한 독일 대사관'으로 일컫고 있다.
독일어의 "deutsch"의 어원적인 전형태들은 본래 "종족에 속하다"는 의미를 가졌으며 우선은 대륙성 서게르만어군의 방언 연속체를 지칭하였다. 도이칠란트라는 명칭은 15세기부터 사용되었지만 개별문서에서는 이미 그 이전에도 기록이 되어있다. 그 이전에는 "deutsch"라는 수식어가 "Land(땅, 나라, 란트)"와 조합되어 사용된 예만 확인되었다. 가령 부정관사와 단수형태의 "ein deutsches Land" 또는 정관사와 복수형태의 "die deutschen Länder"처럼 쓰였지만 정관사의 단수형태인 "das deutsche Land"으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역사
게르만족은 북유럽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서 가장 늦게 자리 잡아 로마 이전 청동기 시대에 처음 문명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세기에 게르만족은 남부 스칸디나비아와 북독일에서 남쪽, 동쪽, 서쪽으로 진출하여 동유럽의 이란인, 발트족, 슬라브족을 비롯하여 갈리아의 켈트족과 만나게 되었다. 게르만족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이들과 접촉한 로마 제국에서는 관련 기록이 남아 있고, 어원론이나 고고학상의 발굴을 통해서도 관련된 자료들이 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의 푸블리우스 큉크틸리우스 바루스 장군이 게르마니아(로마인들은 대체로 라인강에서 우랄 산맥에 이르는 영토를 이렇게 불렀다.)를 침략하였는데, 이 시기에 게르만족은 부족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로마식 전술에도 익숙해졌다. 서기 9년에 바루스가 이끄는 3개 로마 군단이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케루스키족 족장 아르미니우스(헤르만)에게 전멸당하였다. 이로써 라인강에서 도나우강에 이르는 오늘날의 독일 땅은 로마 제국의 지배권에 편입되지 않았다. 타키투스가 《게르마니아》를 쓴 100년경에 게르만족은 라인강에서 도나우강에 이르는 선을 따라 모여 살았는데, 이들이 살던 땅은 오늘날의 독일 영토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남부 바이에른, 서부 라인란트 지방에서는 로마 속주가 설치되었다. 3세기에는 알라마니족, 프랑크족, 카티족, 작센족, 프리지아족, 시캄브리족, 투링기족 등 규모가 큰 서부 게르만 부족이 나타났다. 260년경에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 국경와 도나우강 국경선을 넘어 로마 영내로 들어왔다.
신성 로마 제국 (962년 ~ 1814년)
800년 12월 25일에 샤를마뉴는 카롤링거 제국을 세웠으나, 843년의 베르됭 조약으로 나라는 세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그 가운데 한 부분인 동프랑크 왕국이 962년에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져 1806년까지 존속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는 북쪽의 아이더 강에서 남쪽의 지중해 해안에 이르렀다.
오토 왕가의 치세(919년 ~ 1024년)에 로타링기아 공국, 작센 공국, 프랑켄 공국, 슈바벤 공국, 튀링엔 공국, 바이에른 공국이 합방하였으며, 962년에 독일 왕이 이들 지역을 지배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잘리어 왕가 치세(1024년 ~ 1125년)에 신성 로마 제국은 북부 이탈리아와 부르고뉴 지방을 흡수하였으나, 서임권 분쟁으로 말미암아 잘리어 왕가의 황제들은 권력을 잃었다. 호엔슈타우펜 왕가 치세(1138년 ~ 1254년)에 독일의 제후들은 슬라브족이 사는 남쪽과 동쪽 지방으로 영향력을 넓혔는데, 전부터 이들 지방과 동방 식민지(오스트지들룽)에는 독일의 정착지가 있었다. 북독일의 도시들은 한자 동맹의 일원이 되어 번영하였다. 1315년의 대기근이 일어나고 뒤이어 1348년 ~ 1350년 사이에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독일의 인구는 급감하였다.
1356년에 나온 금인칙서는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할 때까지 제국의 기본 헌법이 되었다. 금인칙서에서는 강력한 공국이나 주교령을 다스리는 선거후 일곱 사람이 황제를 선출하도록 규정하였다. 15세기부터 제국에서 선출된 황제 제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독차지하였다.
1517년에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출간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관습에 대항하여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 마르틴 루터의 파문, 보름스 국회 심문, 농민전쟁, 에라스뮈스와의 ‘자유 의지론’을 둘러싼 논쟁을 통한 인문주의와의 결별 등을 거쳐 분리된 루터교회는 1530년 이후 독일 내 여러 나라들의 공식적 교회가 되었다.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종교 분쟁으로 30년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독일은 황폐화되었다. 독일에 있던 나라들의 인구는 30% 정도 줄어들었다.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독일의 종교 전쟁은 종식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수많은 독립 공국으로 갈라졌다. 1740년부터 합스부르크 제국와 프로이센 왕국간의 대립이 독일 역사의 주요 양상으로 나타난다. 1806년에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하였다.
반동과 혁명 (1815년 ~ 1870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하고 1815년에 빈 회의가 소집되었으며, 39개 주권국의 느슨한 연맹체인 독일 연방이 성립하였다. 왕정 복고를 놓고 이견이 나타나면서, 통합과 자유를 요구하는 자유주의 운동이 발흥하는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메테르니히는 이러한 자유주의 운동을 탄압하였다. 독일 관세 동맹(Zollverein)은 독일 내 여러 나라들의 경제 통합을 크게 진전시켰다. 이 시기에 여러 독일인들은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경도되었으며 민족주의가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당초 검은색, 붉은색, 황금색은 독일 민족주의 운동의 상징이었으나, 나중에 독일 국기의 색이 된다.
유럽의 1848년 혁명으로 프랑스에서 공화정이 성립하자, 독일의 지식인들과 평민들도 혁명을 일으켰다. 처음에 군주들은 혁명주의자들의 자유주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황제 칭호를 받았으나 권력을 잃자 왕위를 거부하고 헌법을 제한하여 일시적으로 혁명 운동에 제동을 걸었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와 자유주의 세력이 강해진 의회는 1862년에 군제 개혁을 놓고 갈등하였다. 왕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프로이센의 총리로 임명하였다. 비스마르크는 1864년에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덴마크를 무찔렀다. 1866년에는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하여 비스마르크는 북독일 연방을 창설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과거 독일의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여타 독일 국가들의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게 되었다.
독일 제국 (1871년 ~ 1918년)
1871년에 독일 제국이 사상 최초로 독일의 통일을 이룬 근대 국가가 되었는데, 이 가운데 프로이센 왕국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무찌르면서 1871년 1월 18일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건국이 선포되었다.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왕가가 독일 제국 전체의 황제를 겸임했으며, 수도는 베를린이었다. 독일 제국은 오스트리아 외의 독일의 모든 지방을 통일하였다. (소독일주의) 1884년부터 독일은 유럽 바깥 지역에 식민지를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독일의 통일 이후 그륀더차이트 시대(창설 시대)에 독일 제국은 수상 비스마르크의 지도로 타 열강들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중 삼중의 비밀 외교로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독일은 영국, 프랑스 등과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해외 식민지 쟁탈 경쟁에도 뛰어들지 않았다. 대신 독일은 "식민지 대신 화학을"이라는 슬로건처럼 뒤늦게 산업 혁명을 추진하여 산업 국가로 거듭났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독일은 내부 모순 및 문제에 직면했으며 이 내부 문제는 노동조합과 독일 사회민주당을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의 활발한 운동으로 표면화되었다. 뒤이어 황제로 등극한 빌헬름 2세는 유럽의 다른 열강처럼 제국주의 정책을 내세워 이웃 나라들과 마찰을 빚었다. 이 때문에 이전에 독일이 맺고 있던 거의 대부분의 동맹이 갱신되지 않았으며, 새로운 동맹에서는 독일이 빠졌다. 특히 프랑스는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영국)과 영국 협상(Entente Cordiale)을 맺고 러시아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확보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관계를 맺은 것 외에 독일은 점차 고립되었다.
독일은 자국 영내를 벗어나 유럽 열강들이 벌이고 있던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베를린 회의에서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를 나눠가지기로 합의하였다. 독일은 독일령 동아프리카, 독일령 남서부 아프리카, 카메룬, 토골란드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여러 영토를 확보하였다. 아프리카 쟁탈전으로 열강 사이에 긴장 상황이 벌어졌으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데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914년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살해당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동맹국 측에 섰던 독일은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손꼽히는 이 전쟁에서 연합국에 패배하였다. 전쟁 중 독일군 전사자는 2백만 명에 이른다.[18] 1918년 11월에 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빌헬름 2세와 독일의 모든 제후가 폐위되었다. 그해 11월 11일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이 끝났으며, 독일은 1919년 6월에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전통적인 전후 외교 방식과 달리 당시 협상에서는 패전국인 동맹국이 배제되었다. 독일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이 다른 수단을 통한 치욕스러운 전쟁의 연속으로 여겨졌으며, 조약에서 규정한 가혹한 조건 때문에 이후 나치즘이 발흥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 (1919년 ~ 1933년)
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은 공화국으로 선포되고 왕정이 무너졌다. 그러나 권력 투쟁은 이어졌는데 급진 좌익세력이 바이에른에서 권력을 잡았지만, 독일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독일 혁명은 1919년 8월에 바이마르 공화국이 공식 출범하면서 끝을 맺는다. 1919년 8월 11일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이 바이마르 헌법에 서명하면서 헌법이 발효하였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가혹한 화의 조건을 강요받은데다 마침 대공황까지 닥쳤으며, 불안정한 정부들이 세워지고 무너지기를 거듭하자 독일 사람들은 점차 의회 민주주의 정치 체체와 주류 정당들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극우 세력(루터교, 국가주의자, 나치)들은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까닭은 정부 전복을 원하는 자들 때문이라는 소위 등 뒤의 칼 찌르기 이야기(Dolchstoßlegende)를 퍼뜨리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바이마르 정부의 수뇌부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독일 민족을 배신하였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스파르타쿠스단과 같은 급진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평의회 공산주의(Räterepublik)를 지지하며 "자본주의 지배"를 철폐하기 위한 혁명을 원하였다.
새 바이마르 정부에 대한 불만 때문에 독일 공산당이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여러 보수주의자들은 반동적이거나 혁명적인 극우로 쏠렸는데, 그 가운데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있었다. 1932년에 공산당과 나치가 의회 다수(1932년 7월 기준으로 총 296석)를 차지하였다. 여러 내각이 실패를 거듭한 끝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별다른 대안이 없음을 알고 우익 고문들의 압박으로 1933년 1월 30일에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의 총리로 임명한다는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나치 독일 (1933년 ~ 1945년)
1933년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이 불길에 휩싸였으며 뒤를 이은 비상 법령으로 시민 기본권이 폐지되었다. 의회에서 수권법이 통과되면서 히틀러는 무제한적인 입법권을 부여받았다. 이때 사회민주당만이 반대표를 던졌는데, 독일 공산당 의원들은 이미 투옥된 상황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으로 모든 반대 세력을 무너뜨리고 몇 달도 안되어 중앙집권적인 전체주의 국가를 세웠다. 군사 재무장에 역점을 두어 산업이 회생하였다. 베르사유 조약 당시 독일은 자르와 라인란트를 잃었는데, 1935년에 독일은 국제 연맹이 관리하던 자르 지방을 되찾았으며 1936년에는 라인란트를 군대로 장악하였다.
군사 재무장과 더불어 독일의 외교 정책은 더욱 공격적이고 확장적인 방향을 취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독일은 1938년과 1939년에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각각 점령하였으며,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였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 사건) 1939년 9월 1일, 독일 국방군은 폴란드에 전격전을 개시하여 폴란드는 순식간에 독일과 소련의 붉은 군대에 점령당하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독일과 여타 추축국은 유럽 대륙의 상당 지역을 장악하였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였다. 같은 해에 일본이 진주만의 미군 기지를 기습하였으며, 일본과 동맹을 맺은 독일은 미국에 선전포고하였다. 독일 군대는 소련 영내로 신속히 진군하였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황이 뒤집혔다. 이후 독일군은 동부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1943년 9월에 독일의 동맹국인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독일군이 이탈리아를 점령하면서 독일은 새로운 전선을 감당해야 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역시 서부 전선을 열면서 2차 대전의 전환점이 되었는데, 독일은 얼마 안되어 패배하였다. 1945년 5월 8일, 붉은 군대가 베를린을 점령한 뒤 독일군이 항복하였다. 이 전쟁에서 독일인 군인 및 민간인(중앙유럽의 독일계 인구도 포함하여) 7백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19]
독일 제3제국은 나중에 '홀로코스트'라고 불린 대학살을 통하여 수많은 반대 세력과 소수 집단을 직접 탄압하기 위한 정책을 실행하였다. 홀로코스트로 1,700만 명이 살해당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유대인 600만 명, 집시와 폴란드인, 소련의 전쟁 포로를 비롯한 러시아인,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적 반대 세력 상당수도 있었다.[20] 제2차 세계 대전과 나치의 학살로 유럽에서 죽은 사람의 수가 4천여 만 명이 넘는다.[21] 전후 나치의 전쟁 범죄를 심판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다.
분단과 재통일 (1945년 ~ 1990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수많은 독일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독일은 오데르-나이세선 동쪽 영토를 잃고 옛 동부 영토와 다른 지역에서 독일인 1,500만 명이 추방되었으며, 독일 여성 2백만 명 이상이 강간당하고, 여러 주요 도시가 파괴되었다. 남은 영토와 베를린은 연합국이 4개 군사 점령 지구로 분할하였다.
1949년 5월 23일에 독일 영토 가운데 프랑스, 영국, 미국이 통제하는 서방측 지구가 통합하여 독일 연방공화국이 들어섰으며, 같은 해 10월 7일에 소련측 지구는 독일 민주 공화국이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주로 두 나라를 각각 '서독'과 '동독'으로 칭하였으며, 베를린 역시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갈라졌다. 동독은 동베를린을 수도로 삼았으며, 서독의 경우는 본이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서독은 두 나라로 갈라진 당시 상태가 언젠가는 종식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으므로 수도 본의 지위를 임시적인 것으로 규정하였다.
서독은 "사회 시장 경제" 체제와 더불어 연방제 의회 공화국 체제를 수립하였으며, 미국,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1950년대 초부터 서독은 장기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1955년에 서독은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하였으며, 1957년에는 유럽 경제 공동체에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동독은 동구권에 속한 나라로 바르샤바 조약과 붉은 군대 점령군을 통하여 소련의 정치/군사적 통제를 받았다. 동독은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하긴 하였으나 권력은 공산주의 세력인 독일 통일사회당(SED)의 정치국원들이 독점하였다. 이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거대한 비밀 정보 기관인 슈타지와 그 밖의 여러 통일사회당 하부 조직을 통해 사회 전반을 통제하였다. 그 대신 국가는 싼 값에 대중의 기초 생활 필수 재화를 제공하였다. 동독은 소련식 계획 경제 체제를 세웠으나 나중에는 경제상호원조회의(코메콘)에 가입하였다. 동독에서는 주로 동독의 사회 보장 제도의 이익과 더불어 서독이 언제든 침공할지 모른다는 내용을 선전하였으나, 동독 시민 절대다수는 서방의 정치 자유와 경제 번영을 부러워하였다. 동독인이 서독으로 월경하지 못하게끔 막고자 1961년에 건설한 베를린 장벽은 냉전의 상징이 되었다.
1970년대 초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동서독간의 대립이 어느 정도 완화되었는데, 이 정책에는 독일이 2차 대전에서 영토를 잃은 사실을 사실상 인정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1974년 FIFA 월드컵에서 서독과 동독이 동반진출한 바도 있었다.
1989년 5월 2일, 헝가리가 철의 장막을 해체하기로 결정하고 8월 23일에 국경을 개방하자 9월 11일에 동독인 수천 명이 헝가리 국경을 통해 서독으로 탈출하였다. 이 사건이 동독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동독 당국은 11월에 뜻밖에도 국경 제한을 해제하여 동독 시민들이 서방을 다녀갔다. 당초 동독은 자신이 국가로서 계속 존속할 수 있게끔 통제 정도만 조절하기 위한 의도로 국경 개방 조치를 단행하였으나, 이 일로 말미암아 동독에서 벤데 개혁이 가속화되었으나 결국 1년 뒤인 1990년 9월 12일에 2+4 조약으로 귀결되어 전후 당시 독일을 점령하던 4개국은 항복 문서에 따른 자신들의 권리를 폐기하고 독일에 완전한 주권을 돌려주었다. 덕분에 1990년 10월 3일에 독일은 재통일을 이루었으며, 옛 동독에서 새로이 편성된 다섯 주가 독일 연방공화국에 귀속되었다.
베를린의 수도 인정과 유럽 연합 통합 (1990년 ~ )
1994년 3월 10일에 의회에서 가결한 본-베를린 법에 의거하여 베를린은 통일 독일의 수도로 지정되었으며, 본은 연방 도시(Bundesstadt)라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받고 일부 연방 부서가 이 곳에 남았다. 정부 기관 재배치는 1999년에 완료되었다.
그러나 통일 이후 고물가, 실업 증가, 시장경제 환경으로 인하여 옛 동독 사람들의 부적응과 같은 여러 문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재통일 이후 독일은 유럽 연합과 북대서양 조약기구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독일은 발칸 반도에 평화 유지군을 파병하고,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일원으로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도 참전하였다. 이러한 파병을 놓고 논란이 일어났는데 전후 독일은 국내법에 따라 국방 기능을 위해서만 군대를 운용할 수 있도록 규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외 파병은 이러한 국방 제한 규정에 저촉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이 사안에 관하여 의회에서는 표결을 통해 평화 유지를 위한 참전을 합법화하였다.
자연 환경
지리
독일의 면적은 357,021km2로, 이 가운데 육지 면적은 349,223km2, 내수면 면적은 7,798km2이다. 독일은 유럽에서 7번째로, 세계에서는 63번째로 넓은 나라이다. 국토는 유럽 중앙부에 위치하여 9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북해 및 발트해와 맞닿아있다. 지형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차츰 낮아지며, 알프스 지대·중앙 구릉 지대·북부 독일평야의 4대 자연 구역으로 나뉜다. 그리하여 도나우강 외에 큰 강은 북해와 발트해로 흘러든다. 주요 하천으로는 독일의 산업 중심지를 흐르는 라인강, 베저강, 엘베강과 폴란드와의 국경을 이루는 오데르강이 있다. 알프스산맥에서 독일 영토에 속하는 곳은 거의 산맥 북사면에 한정되고, 표고도 최고 3000m가 못 된다. 독일의 최고봉인 추크슈피체산은 높이가 2,963m이다. 알프스 전지는 빙하의 퇴적물로 덮여 있다. 중앙 구릉 지대는 복잡한 지질구조를 가진 지괴 산지와 분지로 이루어지고, 동쪽의 에르츠산맥과 서쪽의 라인 고지 사이에 하르츠 산지·튀링엔 숲 등의 소지괴가 있다. 북부 독일 평야는 과거 빙하로 덮여 있어서 그 퇴적물이 남아 있고, 이탄지와 소택지도 많다.
독일의 기후
북서부 지역은 해양성 기후, 남동부는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전반적으로 겨울은 한랭하며, 여름은 온화하나 변덕스러운 날씨를 보인다. 봄이 대체로 늦게 오므로 여름이 짧은 편이다. 7월의 평균 기온은 해안 평야에서 16℃, 남부 고지에서 17℃, 라인 하곡에서는 19℃가 넘는다. 12월부터 3월까지의 겨울은 라인강이 얼 정도로 추위가 혹독하다. 청명한 날씨는 해안 지역은 4-5월, 내륙 지역은 6-9월에 볼 수 있다. 6월까지는 샤프트케르테라 불리는 추운 날이 종종 급습하며, 연중 갑자기 비오는 날이 많다. 여름에는 가장 더운 달의 기온이 북부의 경우 17-18℃, 남부는 25℃로 서늘한 편이다. 1월은 -3℃에서 2℃사이에 있고, 연간 4개월 이상은 10℃이상이다.
정치
독일 연방공화국은 16개의 주가 각자 헌법·정부·재판소를 두는 연방 국가로서, 국가 원수는 대통령이다. 그리고 행정부의 수반은 총리이다. 따라서 연방수상이 내각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 총리는 연방 의회의 과반수를 얻은 자로서, 임기는 4년이다. 입법 기관은 연방 상원과 연방 하원으로 이루어진 양원제로서 상원은 연방 의회의 의결에 대한 거부권이 없다. 연방 의회 의원은 비례대표제와 소선거구제를 병용한 직접 선거인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다. 현 연방 의회 의원 수는 672명(지역구 배정 초과 의석 때문에 매 총선거마다 총수는 달라진다.)이다. 한편 연방 상원은 각 주와 특별시에서 인구 비례에 따라 임명된 대표로 구성되며, 주 정부는 연방 상원을 통하여 연방의 입법과 행정 업무에 참여한다. 입법권은 연방 의회와 연방 상원 모두에 있으나 실질적 권한은 연방 의회에 있다. 정당으로는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CDU)과 그 자매당인 바이에른 기독교 사회연합(CSU), 독일 사회민주당(SPD), 독일 자유민주당(FDP) 등의 기성 정당이 있으며, 1980년대 서독에서 등장하여 기성 정당에 많은 자극과 영향을 준 독일 녹색당, 동독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인 독일 민주사회당(PDS), 1990년 구 동독지역 진보 세력이 창당한 동맹 90 등이 있다.
1949년부터, 독일의 정치 구도는 크게 기독교 민주연합과 사회민주당이 양분하고 있으며 모든 총리들은 이 두 정당들 중 하나에서 배출했다. 허나 상대적으로 더 규모가 작은 자유민주당이나 동맹 90, 녹색당 등도 여러 차례 연립 정부에 참여하며 점차 입지를 넓히고 있는 형편이다. 1982년 10월에 중도 자민당의 내각 사퇴로 슈미트 정권이 붕괴하고 콜 총리가 이끄는 중도 보수 연립 정권이 들어섰다. 1994년 10월 총선 결과 콜 총리의 집권 여당이 승리하여 제5차 콜 정권이 탄생하였다. 독일은 통일 후 중부 유럽 국가에 대규모 경제 지원을 제공하고 이들의 대서방 관계설정에 선도적 역할을 자처하는 한편 세계 무대에서의 영향력 증대를 꾀하고 있다. 1998년 총선에서 사민당이 승리함으로써 슈뢰더 사민당 당수가 새로운 총리가 되었고 2002년 재취임했다. 2005년 총선이후 기민련의 앙겔라 메르켈이 독일 최초의 여성총리로 취임하였다. 2007년부터는 좌파 계열 정당인 좌파당이 독일의 주요 정당들 중 하나로 떠올랐으나, 단 한번도 정부 운영에 참여해보지는 못했다. 2017년 총선에서는 극우 포퓰리즘 계열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이 처음으로 의회에 의석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표를 득표하는 데에 성공했다.
독일의 주요 정당
독일 연방하원 2017년 독일연방공화국 국회의원 총선거 의석수 순서대로 정렬했다.
-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바이에른 기독교 사회연합(CDU/CSU. 246석. 기독교민주주의, 자유보수주의 정당. 현재 여당)
- 독일 사회민주당(SPD. 153석. 사회민주주의 정당. 현재 여당)
- 독일을 위한 대안(AfD. 92석. 유럽회의주의, 극우 정당. 현재 제 1야당.)
- 독일 자유민주당(FDP. 80석. 자유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정당.)
- 좌파당(Die Linke. 69석.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을 계승한 민주사회주의 정당.)
- 동맹 90/녹색당(Bündnis 90/Die Grünen. 67석. 환경주의, 다원주의 정당. 현재 지지율 2위)
- 파란당(Blau. 2석. 민족보수주의 정당. AfD의 우경화에 반발한 의원 두명에 의해 창당됨)
연방 하원엔 진출하진 못하였으나 주의회, 유럽 의회에 진출한 주요 군소정당은 이렇다.
- 독일 국민민주당(NPD. 신나치주의 극우 정당.)
- 당(Die PARTEI. 장난 정당)
- 자유유권자(FW. 혼합정치, 보수주의 정당.)
- 독일 해적당(Die Piraten. 해적당.)
행정 구역
16개 주(Land. 정식 명칭은 연방주 Bundesland)로 구성되어 있다.
- 바덴뷔르템베르크주 (Baden-Württemberg)
- 바이에른주 (Bayern)
- 베를린 (Berlin)
- 브란덴부르크주 (Brandenburg)
- 브레멘주 (Bremen)
- 함부르크 주 (Hamburg)
- 헤센주 (Hessen)
-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 (Mecklenburg-Vorpommern)
- 니더작센주 (Niedersachsen)
-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Nordrhein-Westfalen)
- 라인란트-팔츠 주 (Rheinland-Pfalz)
- 자를란트주 (Saarland)
- 작센주 (Sachsen)
- 작센안할트주 (Sachsen-Anhalt)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Schleswig-Holstein)
- 튀링겐주 (Thüringen)
국방
독일은 서방국가 중에서는 거의 유일한 징병제 국가였으나[22], 2010년에 기존 정책을 폐기하고, 모병제로 전환하였다. 148,996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차 408대, 전술기 783대, 군함 90척을 보유하고 있다. 예산 감축으로 독일 연방방위군은 전력이 절반 이하로 크게 줄어버렸으며, GFP의 순위에서도 10위 밖으로 밀려났다. 독일은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추축국이어서 그것에 관련된 조약들이 있다. 독일은 2차세계대전 (나치독일) 당시에 세계 최초의 순항미사일 V-1 로켓과 세계 최초의 탄도 미사일 V-2 로켓과 그 외에도 여러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였거나 설계하였다. 세계최초의 제트 전투기 Heinkel He280을 개발하였다. 프로토타입이 시험비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세계최초의 양산 제트 전투기인 메서슈미트 Me 262도 있다. 세계최초의 스텔스 항공기 Horten Ho 229 전익기를 개발하였고 세계 최초로 램제트 엔진을 개발하였다. 여러 종류의 제트 전투기들도 개발하거나 계획하였다. 세계최초의 지대공미사일 Fliegerfaust(Luftfaust) Surface-to-Air Unguided Missile, 세계 최초의 공대공 유도 미사일 Ruhrstahl/Kramer X-4, 세계최초로 성공적으로 만들어지고 개발되고 무선으로 조종되며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공대공(AAM)미사일 Luftkampfrakete Henschel Hs 298, 최초로 실용화된 공대공 로켓 Brodrakete R4/M "Orkan"(Hurricane, 허리케인), Wgr 21(Wurfgranate 21) 210mm 로켓탄(쉽게 말해 다연장 로켓탄을 전투기에 장착하였다.), Jagerrakete X4(Fighter Rocket X4)를 개발하였다. 독일은 세계 최대 잠수함 건조 국가이다. 1706척(1·2차대전 1540척+전후166척)을 건조하였다.
독일 해군은 세계 최고 수준의 재래식 동력 잠수함(디젤 잠수함) 및 구축함 등을 보유 중이고 대양 해군을 추구하고 있다.
경제
독일은 기본적으로 시장 경제 국가로, 매우 뛰어난 질의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부패도도 매우 낮으며 혁신성은 높은 선진국이다. 세계 3위의 수출국이며, 명목 GDP 순으로는 세계 4위, PPP로 환산할 시에는 5위에 달하는 경제 규모를 자랑하며 유럽 내에서는 가장 거대한 규모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 1인당 GDP는 EU 국가 평균의 121%에 달한다. 전체 GDP의 69%가 서비스업이며, 산업이 31%, 농업이 1%로 집계되고 있다. 2020년 1월 기준으로 실업률은 3.2%로, EU 전체에서 4번째로 낮았다.
독일은 유럽 단일시장의 일원으로, 무려 4억 5천만 명에 달하는 시장에 자유롭게 물건들을 내다팔 수 있다는 막대한 이점을 가지고 있다. 2017년 기준으로 독일은 유로존 경제의 28%를 차지하였으며, 2002년에는 단일 통화인 유로를 받아들였다. 유로의 금융정책은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유럽 중앙은행이 통제한다. 독일은 현대식 자동차의 고향으로 불릴 정도로 자동차 산업이 발달해있는데, 세계 4위의 자동차 생산국이기도 하다. 독일의 10대 수출품은 장비, 기계류, 화학물질, 전기제품, 약품, 음식, 고무, 플라스틱 제품 등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500대 기업들 중 29개가 독일에 본사를 두고 있다. 30개에 달하는 독일 기업들이 프랑크푸르트 주식거래소의 닥스에 상장되어 있다. 독일의 유명한 기업에는 메르세데스-벤츠, BMW, 폭스바겐, 아우디, 아디다스, 포르셰, 도이치 텔레콤 등이 있다. 특히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은 스타트업 기업들의 허브라고 불릴 정도로 창업하는 기업들이 많으며, 유럽 연합 내에서도 막강한 경제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독일은 중소기업 강국으로 손꼽히며, 각자 분야에서 세계 선두를 점하고 있는 중소기업들이 전체의 48%에 달할 정도로 매우 기술력이 뛰어나다.
독일은 과학 기술에도 엄청난 투자를 쏟고 있는데, 2018년 기준으로 독일은 세계에서 4번째로 연구 논문을 많이 발표한 나라이며, 특히 막스 플랑크 연구소 등 저명한 연구소들이 독일에 집중되어 있다. 또한 독일은 유럽 우주국의 최대 자금 공급국이기도 하다.
경제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폐허 속에서 독일 경제는 기적적인 부흥을 이룩하여 민주주의 국가 중에서는 미국과 일본 다음가는 지위를 굳혔다. 이러한 성장을 가져오게 한 요인은 공산주의가 유럽에서 세력을 넓히지 않게 하기 위해 경제적 지원을 한 미국의 마셜 플랜과 국민의 근면성·높은 기술수준·적절한 경제정책에 바탕을 둔 공업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 등이다. 독일은 국민총생산의 1/3을 수출에 의존하고 있어 서방선진국과 비교해 볼 때 높은 편이다. 독일은 1975년 창설된 서방 경제선진국 정상모임인 G7의 일원이다. 또한 EU의 통합에 프랑스와 같이 중추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통일 이후
통일 후 독일 경제는 큰 혼란을 겪었다. 통일 당시 동독주민의 노동생산성은 서독의 1/5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기술의 상대적 낙후, 장비의 노후, 환경오염 및 사회기반시설의 낙후로 동·서독지역이 균형있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투자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신탁관리청 산하의 관리대상으로는 8,500개 이상의 국유기업, 국영 도소매업·서비스업, 사회주의통일당(SED) 및 구 동독 정부기관의 부동산, 구 인민소유 협동농장(LPG) 등으로서, 사유화 대상기업에 소속된 노동자수는 410만 명으로 구 동독 전 노동자수의 45%에 달한다. 원래 공매절차를 고려하였으나 기업의 부실 정도가 지나쳐 수의계약에 의한 매각방법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통일 후 신생연방주의 산업입지 여건은 막대한 국가지원에도 불구하고 불리하다. 90∼93년 신생연방주에 투자한 액수는 공공·민간부분을 합쳐 3,110억 마르크로 한 해 평균 1,000억 마르크 이상을 상회하였으나, 이 액수는 같은 기간 구연방주에 투자한 액수의 16.3%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 2차산업 부문의 40%가 넘던 산업구조가 34.8%, 3차산업 50%로 행정·통신·교통·상업 부문과 건설 부문에서 급격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과학 기술
독일은 물리학, 기계공학 수준이 우수하다. 여기에는 독일 정부의 과학기술 연구소 및 연구회에 대한 전폭적 지지가 바탕이 되는데, 독일의 총 연구개발투자(공공 및 민간포함)는 약 964억 9000만 달러(2008년, GDP의 약 2.64%) 수준으로 미국 및 일본에 이어 세계 3위 규모이며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전체 지출액의 약 28%를 부담한다. 정부는 앞으로 연구에 대한 투자를 GDP의 10%수준까지 끌어올리고 R&D투자 또한 3%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등 과학기술 연구소에 큰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23] 현재 독일에는 750여개의 국가 지원 연구기관이 있으며, 공공재원으로 운영되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은 막스 플랑크, 프라운호퍼, 헬름홀츠, 라이프니츠 등 4대 연구협회에 속해 있다. 또 연구협회별로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연구비 지원 비율이 각각 다르게 적용되는 등 매우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있다.[24] 막스 플랑크 협회는 산하 80개 연구소를 둔 기초과학분야 중심의 연구회이며, 프라운호퍼 협회는 56개 연구소를 가진 응용과학분야 연구회이다. 헬름홀츠 협회는 장기 프로젝트 위주의 연구를 하는 15개 대형 연구소의 연합이다. 마지막으로 라이프니츠 과학협회는 연방 및 주정부의 공동 지원을 받는 개별 80개 연구소들의 연합이다.
산업
농·수산업
농·수산업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2%다. 농업용 토지이용은 국토면적의 1/2로 경작지가 32.1%, 초지가 14.7%를 차지한다. 농업인구는 전독일 경제활동인구의 3.1%를 차지한다. 농산물은 북부의 호밀·감자, 중부의 밀·사탕무, 서부의 낙농제품·포도, 남부의 호프 등이다. 사실 독일의 농업은 목축과 밀접히 맺어져 있어, 어느 농가에서나 가축을 사육하고 사료작물을 만들고 있다. 밀의 총생산량은 22,800,000톤(2011년, 세계 9위, 3.24%)[25]이다. 축산물의 수요 증대에 따라 북부 독일의 저습지 등에서도 목축업이 매우 성하다. 국토의 1/4을 차지하는 삼림은 대부분이 침엽수림으로서, 제재·펄프 원료로 이용되고 있다. 어업은 연안어업 외에 북해·북극해에서 조업하고 있으나, 북해의 해양오염으로 어획량은 계속 감소될 것으로 보인다. 주로 청어·대구 등이 잡힌다.
자원·광업
석탄은 독일 공업의 어머니로 불리며, 루르 탄전과 자르 탄전 등에서 출탄하며 가장 규모가 큰 광산물로 되어 있다. 한편 암염도 석탄과 함께 주요 광물자원으로서 수출되고 있다. 이 밖에 칼륨, 보크사이트, 철광석 등을 대량 산출한다.
공업
광공업에 종사하는 인구율은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31.1%이며 GNP 기여율은 36.7%이다(1992). 매출액을 기준으로 하였을 때 자동차·기계·전기·전자·화학·식품공업이 비슷한 규모로 주요산업을 구성한다. 독일 최대의 공업지역은 라인·루르 지역이다. 이 곳은 조밀한 교통망과 독일 전역을 연결하는 수로망이 구축되어 있으며, 이 곳의 뒤스부르크항은 유럽최대의 내륙항으로 루르 지역의 관문이 된다. 독일 공업의 특징적인 성격은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아주 높다는 것이다. 특히 자동차 공업과 철강·전기공업·기계금속공업·화학공업도 높은 성능과 품질로 세계 시장에서 신뢰받고 있다.
무역
독일은 세계의 주요 흑자국이다. 주요 수출품은 기계류·자동차·전기기기·철강·화학공업 제품 등이고, 수입품은 원유·농산물·전기기기·의류제품 등이다. 에너지절약 기술의 발달로 석유수입이 차지하는 비율은 1980년 초 17%에서 1990년대 7% 이하로 감소하고 있다. 원료를 수입하여 고품질의 생산재·반제품·완제품을 수출하는 고도의 선진 공업형 무역구조를 가지고 있다. 주요 무역대상국은 EU 역내교역이 55%로 그 비중이 가장 높고 그 중에서도 프랑스가 최대의 교역국이다. EU 외의 국가 중에서는 미국, 중국, 스위스가 가장 중요한 교역상대국이다. 통일 후 동구권 및 독립국가연합(CIS) 국가와의 급격한 교역증대가 기대되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한편 통일 후 수출액이 감소하고 있어 흑자폭 또한 감소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신생연방주에서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은 세계 1~2위를 다투는 수출국가로 2000년대 들어 미국,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수출국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2008년까지 수출액 세계 1위였으며, 2009년에는 1조1500달러로 중국에 이어 세계 제2위를 기록하였다. 2009년 수입액은 9310억 달러로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 3위였다.
교통
독일 통일 후 동독의 ‘제국철도’는 국철에 통합되었다. 철도의 총영업거리는 4만 900km이고, 이 중 1만 6,000km가 전철이다. 1992년 등록된 자동차 수는 4,667만 대이며, 이 중 3,900만 대가 승용차이다. 주도 이상의 도로는 총연장이 22만 1,000km에 달하고, 이 중 고속도로는 1만 1,000km로 미국 다음으로 세계 제2위이다. 독일에는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이 있다. 독일의 항공사로는 국영의 ‘루프트한자’가 있으며 220대의 여객기를 가지고 있다. 90여개국과 상호 항공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세계의 200여 주요도시를 연계시키고 있다. 프랑크푸르트·뮌헨·뒤셀도르프·베를린·함부르크 등 주요 도시에 국제공항이 있으며, 특히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은 유럽 제2의 국제공항이다.
사회
민족과 인구
주민의 거의 대부분은 독일인이다. 동화되었지만 켈트인·라틴인·슬라브인 등 복잡한 피가 섞여 독일 민족을 구성해왔다. 소수민족은 덴마크인, 소르브인, 터키인, 러시아인, 세르비아인, 화교, 쿠르드족, 기타가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고유의 문화와 언어, 역사, 민족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민족 | %[26] | 인구[27] |
---|---|---|
유럽인 | 88.0 | 70,593,332 |
독일인 | 80.7 | 64,737,294 |
폴란드인 | 2.0 | 1,604,394 |
러시아인 | 1.7 | 1,363,735 |
유고슬라비아인 및 기타 유럽인 | 3.6 | 2,887,909 |
중동인 | 5.2 | 4,171,424 |
터키인 | 4.0 | 3,208,788 |
아랍인, 이란인 및 기타 중동인 | 1.2 | 962,636 |
아시아인 | 2.0 | 1,604,394 |
아프리카계 독일인, 흑인 | 1.0 | 802,197 |
혼혈 | 2.0 | 1,604,394 |
그 외(주로 미국인) | 1.8 | 1,443,955 |
전체 인구 | 100.0 | 80,219,695 |
독일의 인구는 2011년 5월 기준으로 8,020만 명으로[28], 유럽 연합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이고 유럽에서는 러시아 다음으로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이며, 세계에서는 16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이다.[29] 인구 밀도는 평방킬로미터당 225명이다. 독일인의 평균 수명은 80.19세(남성은 77.93세, 여성은 82.58세)이다. 출산율은 2011년 기준 여성 1인당 1.41명, 인구 1,000명당 8.33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1970년대부터 사망률이 출산율보다 높은 상태가 유지되어 독일 인구의 자연증가율은 만성적으로 감소세를 기록하고 있다.[30]
독일 이주자의 생활
이주민 가정은 독일에서 사회적으로 향상되거나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 20년 동안 사회통합 분야에서는 큰 진전이 있었다. 독일 국적 취득을 위한 법적 기준이 완화되었고 이민자와 독일인 간의 교류가 활성화되었으며, 다른 인종 및 문화의 다양성을 수용하는 분위기가 크게 강화되었다.
독일 이주자의 인구
2011년 독일 통계청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전체 79,652,370명 중에 15,016,960명의 이주자들이며, 이는 전체 인구의 약 18.9%에 해당한다. 지역별로 보면,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약 4백만 명의 가장 많은 수의 이주자가 살고 있다.[31] 독일 경제는 전후 50년대의 경제성장 이래로 이주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독일은 외국인 노동자의 나라에서 차차 이민자의 나라로 변한 것이다. 독일로 이주해오는 또 하나의 큰 집단으로는 수 세대 전부터 구 소련, 루마니아, 폴란드 등에서 살다가 공산체제 붕괴 후 독일로 돌아온 이들을 꼽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부류의 이주민들로 인해 80년대 독일의 인구 수 대비 이주민 수는 전통적 이민국인 미국, 캐나다, 호주보다도 높았다. 독일에 살고 있는 외국인 가운데에는 터키인이 250만 명으로 가장 많으며, 나머지 150만 명은 주로 구 유고슬라비아 또는 그 후속국가에서 온 이주민이다.
지역 | 2011년 5월 9일 기준 인구 (단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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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 | 비이주자 | 이주자 | ||||||
합 | 거주 지속 기간 | |||||||
5년 이하 | 5~10년 | 10~15년 | 15~20년 | 20년 이상 | ||||
바덴뷔르템베르크주 | 13.1 | 74.8 | 25.2 | 10.4 | 11.2 | 13.2 | 15.7 | 49.5 |
바이에른주 | 15.5 | 81.4 | 18.6 | 12.2 | 12.9 | 14.3 | 15.4 | 45.2 |
베를린 | 4.1 | 76.1 | 23.9 | 14.3 | 13.3 | 13.5 | 12.8 | 46.1 |
브란덴부르크주 | 3.1 | 95.6 | 4.4 | 15.0 | 18.5 | 17.1 | 11.3 | 38.0 |
브레멘주 | 0.8 | 74.9 | 25.1 | 12.2 | 11.9 | 14.7 | 17.4 | 43.9 |
함부르크 주 | 2.1 | 72.5 | 27.5 | 11.6 | 12.5 | 14.0 | 15.2 | 46.7 |
헤센주 | 7.4 | 75.1 | 24.9 | 11.5 | 11.9 | 13.4 | 15.7 | 47.5 |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 | 2.0 | 96.3 | 3.7 | 18.1 | 20.9 | 20.1 | 9.5 | 31.5 |
니더작센주 | 9.7 | 83.5 | 16.5 | 11.5 | 12.8 | 17.9 | 20.3 | 40.5 |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 21.9 | 75.8 | 24.2 | 10.1 | 11.7 | 13.7 | 15.4 | 49.1 |
라인란트팔츠주 | 5.0 | 81.3 | 18.7 | 11.9 | 12.7 | 14.5 | 18.1 | 42.8 |
자를란트주 | 1.2 | 83.8 | 16.2 | 12.0 | 12.3 | 13.7 | 17.4 | 44.7 |
작센주 | 5.1 | 95.7 | 4.3 | 18.8 | 19.6 | 19.3 | 11.2 | 31.1 |
작센안할트주 | 2.9 | 96.5 | 3.5 | 17.9 | 21.0 | 18.7 | 11.7 | 30.7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 3.5 | 88.3 | 11.7 | 11.7 | 14.1 | 16.5 | 16.4 | 41.4 |
튀링겐주 | 2.7 | 96.7 | 3.3 | 17.3 | 19.1 | 19.6 | 11.7 | 32.3 |
독일 전체 | 100.0 | 81.1 | 18.9 | 11.4 | 12.4 | 14.1 | 15.8 | 46.3 |
종교
독일의 기독교는 프랑크 왕국 시대에 로마 가톨릭이 본격 도입이 되어서 전파되었고 신성로마제국 초기까지 크게 융성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문제들을 신학적으로 논박한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로마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분리된 이후에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의 역사가 있었다. 하지만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분쟁은 종교자유가 선포됨으로써 극복되었다. 독일 국민의 대부분이 기독교(로마 가톨릭과 루터교회)를 신앙하고, 일부는 이슬람교, 유대교, 기타 신흥 종교를 믿는다. 가톨릭은 바이에른을 중심으로 남부 독일에 많고, 개신교는 북부 독일에 압도적이다. 최근에는 영국과 동유럽계 이민에 의해 성공회와 정교회가 들어옴에 따라 독일교회의 교파는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언어
독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공식적인 언어는 독일어이다. 독일어는 유럽 연합에서 사용되는 23개의 공식적인 언어 중 하나이며, 유럽 위원회에서 사용되는 3개의 언어 중 하나이다.[33] 독일에서 유래된 소수 언어는 덴마크어, 저지 독일어, 소르브어, 이디시어, 프리지아어 등이 있다. 이민자에 의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터키어, 쿠르드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등이 있다. 67%의 독일인은 독일어를 제외한 한 가지 이상의 외국어를 할 수 있고 27%는 독일어를 제외한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할 수 있다고 한다.[33]
교육
독일의 교육의 감독 책임은 기본적으로 각 주에 있으며 연방정부의 역할은 크지 않다. 만3~5세 사이의 어린이는 선택 과정인 키타에서 유치원 교육을 받는다. 이후의 10년에서 13년의 교육은 의무적이다. 독일의 6세에서 10세까지의 초등학교 다음 과정으론 숀더슐레, 하우프트슐레, 게샴슐레, 레알슐레, 김나지움 등이 있다. 먼저 하우프트슐레는 5년제인데 졸업을 하면 바로 직업전문학교로 가게 된다. 레알슐레는 6년제인데 졸업하면 직업 전문학교를 갈 수도 있고 중등 2단계로 바로 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김나지움은 9년제이고 대학교로 진학할 수 있다. 김나지움은 5-10학년은 중등1단계, 11-13학년은 중등 2단계로 구분되어 있다. 김나지움 2단계까지 마치면 독일의 모든 대학교를 갈 수 있는 아비투어 시험을 치를 수 있다. 독일에선 초등학교를 4학년 때 졸업할 수 있다. 어떤 초등학교는 6학년에 졸업을 하는 학교도 있다.
방송과 언론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 제 5조에 의거,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며 표현, 출판 및 보도의 자유를 인정하고 국가에 의한 검열 제도는 부정한다. 그러나 이 같은 언론의 자유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며, 청소년을 잔인하고 비윤리적인 출판물과 영화로부터 보호하고 개인의 인격과 비밀을 보호해야 할 윤리적 의무를 수반한다.[34] 독일은 미디어에 대한 집중도가 가장 높고, 언론의 다양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나라 중의 하나인데,[35] 430종 이상의 신문과 60종 이상의 주간지, 그리고 2만 종 이상의 잡지가 발간되고 있다.[36]
신문과 잡지
독일의 신문은 전통적으로 사기업에 의해 운영되어 왔으며 신문에 관한 입법은 주 정부 소관사항이다. 유력한 신문으로는 베스트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 빌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쥐트도이체 차이퉁, 디 벨트가 있으며 이 중 베스트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이 최대 구독지의 자리를 지키고 빌트가 최대 판매 부수를 자랑한다. 독일의 신문은 이전의 부정기적인 인쇄 신문이 기술적·내용적 면에서 발전하여 나타난 것으로, 그 중요 요인의 하나로는 특히 자유민주주의 사조의 대두를 들 수 있다. 1848년 독일 혁명으로 신문 발행이 비교적 자유롭게 되자 신문의 종수가 크게 증가하여 1851-60년간에는 그 종수가 482개에 이르게 되었다. 독일의 일간지 중 지방지는 335종, 전국지는 10종이며 전국지 판매량은 160만부에 불과하나 지방지는 1430만부로 강세를 보인다. 주간지는 현재 약 60종 이상이 발간되고 있다. 대표적인 주간지로는 가장 권위있는 시사 주간지로서 함부르크에서 발행되며 독일의 타임즈로도 불리는 슈피겔, 그리고 1993년에 창간되어 여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포쿠스, 제 2차 세계대전 후 서독의 주요 주간지였던 슈테른 와 포커스 등이 있다.[37]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발행되는 신문·잡지수의 다양함, 지방지의 발달, 광고 전문지의 강세, 국제 기사의 비중 강화, 수준 높은 주간지의 발행, 정당지의 약세 등의 특징이 있다.[34]
방송
독일 방송국 설립에 관한 입법은 각 주의 소관 사항이며 독일 방송은 공영 방송과 민영 방송이 공존하는 이중 체계다. 이전에는 공영 체제로만 운영되었으나 1980년대에 들어서 상업 방송의 필요성이 대두되며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상업적 방송을 허가하는 입법이 1984년 니더작센주에서 통과되었고 민영화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사가 인가되었다. 결과적으로 현재는 공영/민영 혼합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공영 방송에 관한 사항은 주 정부의 법률 또는 주 정부간의 국가 조약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으며 방송의 경우 신문보다 시설, 재정에 있어서 엄격한 규제를 받고 있다.[34] 독일의 방송은 연방 정부의 감독 하에 공단(公團)으로 운영되는데, 각 방송 공단은 각각 독자적으로 방송 내용을 편성·방송하고 있다. 독일의 공영 방송사는 9개의 지방 공영 방송사의 연합체인 ARD와 주 정부간의 합의로 설립된 ZDF, 독일의 해외 홍보 공영 방송인 도이체 벨레가 있다. 민영 방송사는 1985년 설립된 Sat.1, 1986년 설립된 RTL 텔레비전, Tele 5, 프로지벤 등이 있다. 위성 방송으로는 3sat와 Tagesschau 24가 있으며, 1982년 이래 케이블 텔레비전을 설치하기 시작하여 민간 유선 방송망이 활발히 설치되고 있다.[36] ARD가 2012년에 수행한 조사에 따르면 프로그램별 편성에서 공영 방송의 경우 뉴스를 비롯한 정보 프로그램이 전체 방송시간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ARD가 42%, ZDF가 47%를 차지하며, 상업 방송사들은 평균 20% 이하의 편성비율을 보인다.[38] 독일의 라디오 방송은 1923년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시행하였고,[39] 현재는 500개가 넘는 방송국이 있다. 대표적인 해외 공영 방송인 도이체 벨레에선 전 세계에 30개의 언어로 정보와 뉴스를 방송한다. 전국 공영 방송으로는 도이칠란트라디오에서 뉴스 중심의 도이칠란트푼크(DLF)와 음악 위주의 도이칠란트라디오 쿨투어(DKultur)를 방송하며 각 지방 방송마다 별도의 라디오 채널이 있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공영 방송이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들이 라디오 방송을 즐긴다.[34]
복지
1. 연금보험 법정 연금 보험은 독일 연방의 사회복지제도에서 중요한 기둥의 하나이다. 이것은 취업자가 취업생활 후에도 적절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책이다. 2. 실업보험 기본적으로 모든 근로자는 실업보험에 가입되어 있다. 실업보험의 보험료는 근로자와 사용자가 반반씩 지불한다. 3. 간병보험 1995년 1월 1일부터 실시된 간병보험은 간병이 필요한 경우를 위한 사회보장의 보완책이다. 4. 가족에 대한 혜택 1996년부터 가족은 육아보조금이나 면세할당액 중에서 선택을 할 수 있다. 5. 사회보조금 사회보조금은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고, 다른곳에서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지급된다. 독일 연방의 사회보조금법에 따르면 이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은 독일인이건 외국인이건 사회보조금을 청구할 권리가 있다.
문화
독일의 문화는 종교적, 세속적 측면들이 섞여 있으며, 기나긴 유럽 역사 동안 여러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거쳐오며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역사적으로 독일은 ‘시인과 사유자들의 땅’이라고 불렸으며, 독일의 작가들과 철학자들은 서구 사상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다. BBC에서 조사한 국제 연구 조사에 의하면, 2013년과 2014년에 독일은 세계에 가장 긍정적인 효과를 끼치는 국가로 조사되었다. 독일은 옥토버페스트와 크리스마스 리스, 크리스마스 마켓, 글뤼바인, 크리스마스 트리, 스톨렌 등 크리스마스 풍습 등으로 유명하다. 2016년 UNESCO는 41개에 달하는 풍습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였다. 독일은 연방국가답게 공휴일도 주마다 따로 정하는데, 그들 중에서도 10월 3일은 독일 통일의 날로 정해 전국에서 기념하고 있다.
음악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곡가들을 여럿 배출한 바 있다. 제바스티안 바흐, 프리드리히 헨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등은 바로크 기에 활동한 유명한 작곡가이며, 세계적인 작곡가 베토벤은 고전기와 낭만기 중간의 음악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낭만기에는 카를 마리아 폰 베버, 펠릭스 멘델스존, 로베르트 슈만, 브람스 등 여러 작곡가들이 활동하였다. 특히 바그너는 오페라 음악에 기여를 하였고,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는 후기 낭만기와 현대 초기에 뛰어난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다. 20세기와 21세기 초에는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과 볼프강 림 등의 작곡가들이 활동하였다.
2013년 기준으로 독일은 유럽에서 2번째 가는 음악 시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계에서는 4위를 차지했다. 20세기와 21세기 독일 대중음악은 주로 팝, 헤비메탈, 펑크, 팝 락, 인디 음악 등이 번성하였으며, 특히 독일의 전자 음악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DJ들과 예술가들, 폴 반 다이크나 파울 칼크브레너 등은 테크노 음악 등으로 세계적으로 진출하고 있다.
예술
독일 예술은 여러 면에서 서양 미술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르네상스기에는 알브레히트 뒤러, 한스 홀바인,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루카스 크라나흐 등의 예술가들이 활동하였으며, 바로크기에는 루벤스, 요한 밥티스트 치머만이, 낭만기에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칼 스피츠베그가, 인상주의에서는 막스 리베르만, 초현실주의에는 막스 에른스트 등의 화가들이 활동하였다. 19세기 들어서는 여러 화가 모임들이 생겨났고, 이로 인하여 뮌헨과 베를린의 화풍에 영향을 미쳤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표현주의에 대항하여 신객관주의가 떠올랐으며,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이후에는 신표현주의가 유행을 탔다.
독일의 건축은 카롤링거 양식과 오토 양식 등이 있는데, 이후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도 후대에 점차 전파되었다. 독일 민간 건축의 특징은 목재 프레임 구조를 먼저 지은 후 그 사이에 벽토를 채워넣어 만드는 것이다. 유럽에 산업화의 물결이 밀어닥치자, 이에 대항하여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고전주의 양식이 잠깐 유행하였다. 1910년대에는 표현주의 건축이 유형을 탔고, 아트 데코와 다른 현대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독일은 세계의 모더니즘 건축의 선도국들 중 하나이기도 하였는데, 20세기 전반에 걸쳐 수많은 모더니즘 건축가들이 독일에서 배출되기도 하였으며 유리로 뒤덮인 초고층건물의 모습을 이때 처음 설계하기도 했다. 독일의 유명한 건축가들에는 고트프리드 뵘, 프라이 오토 등이 있다. 독일의 디자인도 매우 세계적인 수준인데, 베를린 패션위크는 독일 디자인업의 상징 격으로 매 2년마다 한 번씩 열린다.
철학
독일 문학은 최소 중세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와 볼프람 폰 에셴바흐 같은 작가들이 등장하여 당대에 이름을 날렸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독일인 작가로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프리드리히 실러,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테오도르 폰타네 등이 있다. 또한 그림 형제가 모아 출판한 독일의 민화들은 크게 인기를 끌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도하였다. 그림 형제들은 독일어로 된 지역별 다양한 구전들을 모아 책으로 엮었고, 그 과정에서 독일어를 분석하며 ‘그림 독일어 백과사전’을 함께 출판하기도 하였으며 초본이 1854년에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20세기 독일의 유명한 작가들에는 크게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귄터 그라스, 하인리히 뵐 등이 있다. 이같이 대문호들을 연이어 배출해낸 독일은, 지금까지도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거대한 책 시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프랑크푸르트 북 페어는 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도서 전시회들 중 하나이다.
독일은 철학적으로도 매우 발달한 국가들 중 하나이다.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합리주의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임마누엘 칸트는 계몽주의를 이끌었다. 독일 관념론의 대표적인 철학가들에는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빌헬름 요제프 셸링 등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철학을 이어받아 자신만의 이기적, 염세주의적 철학관을 구축하였으며,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주의의 기초를 놓았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식론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깊은 연구를 남겼으며,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문화철학을 연구하였다.
요리
독일의 요리는 지역과 지역마다 다르고, 지역들마다 인접한 이웃 국가들의 식문화와 상당히 유사하다. 남부 지역들, 예를 들어 바바리아와 스와비아는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식문화와 매우 흡사하기도 하다. 또한 해외에서 들어온 음식들, 예를 들어 피자, 초밥, 중화요리, 그리스 요리, 인도 요리, 케밥 등도 매우 인기가 많다.
독일 요리의 주식은 빵으로, 독일 제빵업계는 현재 600여개가 넘는 빵들을 생산하고 있으며 1,200개가 넘는 종류의 파스트리와 롤빵들을 굽고 있다. 독일의 치즈 생산은 유럽 전체 치즈 생산의 22%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거대하다. 2012년 기준, 독일에서 생산된 육류의 99%는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였다고 전해진다. 독일인들은 이렇게 잡은 고기들을 이용하여 1,500여개가 넘는 소시지들을 생산하는데, 유명한 소시지 종류로는 브라트부르스트와 바이스부르스트 등이 있다. 음료의 경우, 현대에 들어서는 포도주가 점차 인기를 얻고 있지만 국민 전체로 보았을 때에 독일의 국민음료는 바로 맥주이다. 독일인들은 2013년 기준으로 1인당 110리터에 달하는 맥주를 소비하였으며,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의 맥주 소비량을 자랑하고 있다. 워낙 맥주가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국민 음료였기에, 16세기에 독일의 왕 빌헬름 4세는 맥주 순수령을 내려 전국의 맥주 질을 상향시키고자 하기도 했다.
2018년 미슐랭 가이드는 독일에 3스타 레스토랑 11개를 선정하였고, 독일에 있는 별 개수들을 모두 합치면 300개가 넘는다.
스포츠
독일은 올림픽, 월드컵축구, 포뮬러원(F1) 같은 세계 3대 스포츠 축제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유일한 국가다. 올림픽에서 항상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축구의 강국으로 브라질, 이탈리아와 더불어 단 3개국밖에 없는 FIFA 월드컵에서 세 번 이상 우승한 국가들 중 하나이며 월드컵의 평균성적이 상당히 좋으며 2014년 FIFA 월드컵에서 우승하며 통산 4차례 우승 국가가 되었다. 포뮬러원에서는 2013년에 제바스티안 페텔이 종합우승을 차지해 4년연속 챔피언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야구의 경우 베이스볼 분데스리가가 성행 하고 있다.
독일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는 축구이다. 독일축구연맹은 700만 명이 넘는 공식 회원들이 있으며, 단일 스포츠 기구로는 전세계에서 최대 규모이다. 독일의 최고 리그인 분데스리가는 모든 전문스포츠리그에서 2번째로 많은 관심을 받는 세계 최대 규모의 게임 리그이기도 하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은 1954년, 1974년, 1990년, 2014년 FIFA 월드컵에서 승리하였으며, 2017년에는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도 금메달을 따냈다.
독일은 세계 모터 스포츠의 선도 국가로, BMW와 메르세데스와 같은 기업들이 모터스포츠 장비들을 대량으로 생산하며, 포르셰는 르망 24시에서 19번이나 승리하였으며, 아우디는 13번을 승리하였다. 유명한 독일인 드라이버인 미하엘 슈마허는 7번이나 포뮬라 원에서 금메달을 얻어내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드라이버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그 외에도 제바스티안 페텔도 포뮬라 원에서 가장 성공적인 드라이버 5인들 가운데에 꼽힌다. 독일은 올림픽에서도 항상 매우 좋은 성적을 보여왔는데, 현재까지 얻은 모든 메달 수를 합하면 전세계 3위에 달하기도 한다. 또한 독일은 1936년 베를린 하계올림픽과 1936년 동계올림픽을 동시에 개최하며 동일 년도에 동계와 하계 올림픽을 개최한 마지막 국가가 되었다. 뮌헨은 1972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기도 했다.
대외 관계
- 대한민국
독일과 대한민국은 1883년 11월 26일 독일전권대신 주(駐)요코하마 독일총영사 에드워드 잡페(Edward Zappe)와 조선전권대신 민영목간에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외교관계를 맺었다가 한일 병합 조약 (경술국치)로 불가피하게 끊어졌다. 대한민국은 서독간의 외교관계는 1955년 12월 1일 재개되었다. 이후 서독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많은 지원을 해 주었다. 대한민국의 대(對)독일 수출은 107억 218만USD, 독일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143억 489만USD(각 2010년)에 달하여, 독일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8위의 수출국, 제6위의 수입국이다.[40] 과거 분데스리가에서 차범근, 이영표. 차두리 등의 축구 선수들이 활약하였고, 현재는 구자철, 박주호, 지동원 같은 젊은 선수들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 독일로 가는 항공편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인천-프랑크푸르트 노선과 루프트한자의 부산-인천-뮌헨 노선(이 노선의 경우, 부산-인천 구간만의 탑승은 불가능하다.)이 있으나, 인도네시아에서 독일로 가는 경우와 같이 홍콩이나 싱가포르를 경유하여 독일로 가기도 한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는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로 동독과의 외교관계가 끊겼으나 2001년 3월 1일에 다시 수교하였다.
- 일본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일본의 적대국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함께 추축국으로서 연합국과 맞서 싸웠다. 대전 후, 양국은 잿더미에서 기적적인 부흥을 이뤄낸 경제대국이고, 중요한 파트너로서 일본에 있어 독일은 영국, 프랑스를 앞지르고 유럽 최대의 무역 상대국이 되었다. 또한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독일은 일본과 함께 상임이사국을 노리는 G4 국가의 파트너로서 행동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앞두고 나치 독일과 소련은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1939년 8월 23일)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양국은 폴란드 등을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하였다.[41] 그러나 1941년 6월 독일은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과 중앙유럽을 침공하였다. 이 때부터 1944년까지 소련이 점령하던 지역은 독일의 오스틀란트(Ostland)의 일부가 되었다.(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제외) 그 후 소련은 동부 전선에서 일련의 전투를 치르며 독일을 서쪽으로 밀어냈다.[42]
- 폴란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독일과 폴란드의 관계는 더 이상 악화될 수 없을 때까지 악화되었다. 하지만 나치가 패망한 이후 서서히 외교 관계를 회복하고 있다.
- 루마니아
루마니아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연합국에 가담하여 한때 전 국토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제국군에 점령당하여 동맹국에 항복을 한 바가 있었다(부쿠레슈티 강화 조약).
- 프랑스
프랑스 혁명(1789년)으로 알자스 지방에 독일군주들이 갖고 있던 소유권이 영향을 받게 되자 프랑스와 독일군주들간의 긴장관계가 야기되었다.[43]
- 헝가리
955년 아우크스부르크 부근에서 일어난 레흐펠트 전투(Battle of Lechfeld)에서 오토 1세(재위: 936년 - 973년)의 군대에 패해 지휘관들이 처형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헝가리는 최소한 서부 유럽에 있어서는 일시적으로 약탈을 중단하고, 보다 평화적인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게 된다. 오토 3세(재위: 991년 - 1002년)는 헝가리의 그란(현재의 에스테르곰)에 주교 통치 지역을 건설하여 이슈트반 1세를 헝가리의 왕으로 추대(1000년)[44]:53하고, 헝가리 왕국을 건국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헝가리는 중앙유럽에 위치한 가톨릭 국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미클로시 호르티의 헝가리는 영토를 상실함에 따른 반작용으로 차츰 우경화되었다. 호르티는 수정주의 정책을 실시하고 이탈리아 파시스트와 독일 나치의 접근을 용이하게 한다.[45]:200 이리하여 헝가리는 1930년대에 나치 독일의 강요로 동맹 관계를 맺었다. 히틀러는 헝가리에 있는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헝가리를 침공하여 호르티를 나치 합작자로 대체해야 했다.
-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의 인구구성이 1위가 스페인계, 2위가 이탈리아계이며 독일계는 그 뒤를 이은 3위이다. 이 때문에 여러가지 부분에서 친분을 쌓고 있다. 문제는 좋은점과 그렇지 못한 점 양쪽 모두에서 독일과 아르헨티나가 상호협력관계라는 점인데 이 때문에 나치의 전범들이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자 모두 아르헨티나로 도주했다. 하지만 독일 정부의 요청으로 1990년대 이후에 이르러서야 나치 전범들의 상당수를 체포해서 재판에 회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관련 항목
출처
- 박래식 저, 《이야기 독일사:게르만 민족에서 독일의 통일까지》 청아출판사(2006) ISBN 89-368-0354-9
- 조르주 뒤비 지음, 채인택 옮김, 《지도로 보는 세계사》, 생각의 나무 (2006)
- 《독일에 대한 모든 것》
참고 자료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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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lächennutzung”.
- ↑ Gesley, Jenny (2018년 9월 26일). “The Protection of Minority and Regional Languages in Germany”. Library of Congress. 2020년 5월 2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 ↑ “Population by nationality and sex (quarterly figures) [Bevölkerung nach Nationalität und Geschlecht (Quartalszahlen)]”. 《www.destatis.de》. Destatis - Statistisches Bundesamt. 2024년 1월 5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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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 일본에서는 한자 음역은 쓰이지 않고 가타카나로만 '도이쓰'로 표기한다.
- ↑ 유재식 (2002년 6월 26일). “독일-德國”. 중앙일보. 2020년 8월 30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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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ast German World War I Veteran Believed to Have Died. Spiegel Online. January 2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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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세한 것은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참조.
- ↑ 상세한 것은 동부 전선을 참조.
- ↑ 김용구 (1989). 《세계외교사》 1995(上•下 合本)판. 서울대학교 출판부. 2쪽. ISBN 89-7096-413-4.
프랑스혁명은 결국 프랑스의 순수한 국내문제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알사스지방에 독일군주들이 갖고 있던 소유권이 혁명으로 영향을 받게 되자 독일군주들과의 긴장관계가 야기되었다.
- ↑ 박래식 저, 《이야기 독일사:게르만 민족에서 독일의 통일까지》 청아출판사(2006) ISBN 89-368-0354-9
- ↑ 조르주 뒤비 지음, 채인택 옮김, 《지도로 보는 세계사》, 생각의 나무 (2006)
외부 링크
- (영어) 독일 - Curlie
독일
- (독일어/영어) 독일연방공화국 공식 웹사이트 -다매체 다언어 독일 포털사이트
- (독일어/영어) 독일연방공화국 정부 공식 웹사이트
- (독일어/영어) 독일 외무부 웹사이트
- (독일어/영어) 독일 관광청
대한민국
- (한국어/독일어) 주 독일 대한민국 대사관
- (한국어/영어) 주 프랑크푸르트 대한민국 총영사관
- (독일어/영어/한국어) 주한 독일 대사관
- 주 독일 대한민국 대사관 본 분관 Archived 2013년 7월 9일 - 웨이백 머신
- (독일어) KBS 월드라디오 독일어방송
- Deutsch-Koreanische Gesellschaft 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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