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라 제국
팔라 제국은 750년에서 1174년경까지 동인도 지역을 지배한 중세 인도의 제국으로,[8] 인도 아대륙 최후의 불교 왕조이다. 750년에 불교도들이 선거를 통해 고팔라 1세를 가우다 지역의 마하라자디라자(황제)로 선출하면서 팔라 제국이 건국되었다.[9] 팔라 제국은 벵골과 비하르에 걸쳐 형성되었는데, 바이크람푸라, 파탈리푸트라, 가우다, 몽히르, 소마푸라, 람바티(바렌드라), 타말립타, 자갈다라 등의 주요 도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팔라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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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
정치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
마하라자디라자 750년 ~ 770년 1162년 ~ 1174년 | 고팔라 1세(초대) 고빈다 팔라(말대) | |||
역사 | ||||
• 건국 | 750년 | |||
• 멸망 | 1174년 | |||
지리 | ||||
850년 어림 면적 | 4,600,000 km2 | |||
인문 | ||||
공통어 | 고전 산스크리트어[6] 원시 벵골어[7] | |||
민족 | 인도아리아인 | |||
종교 | ||||
종교 | 대승 불교, 밀교, 시바교 | |||
기타 | ||||
현재 국가 | 인도 방글라데시 네팔 |
팔라 제국은 외교적, 군사적으로 뛰어난 제국이었으며, 이들은 거대한 전투 코끼리 군단으로 명성을 떨쳤다. 해군을 육성하여 벵골만에서 상업은 물론, 해상방어전 역시 빈틈없이 수행하였다. 또한 팔라 제국 시대는 인도의 고전 철학과 문학, 회화와 조각의 주요 시초가 시작된 시기로, 소마푸라 마하비하라를 비롯한 웅장한 사원과 승원을 지었고, 날란다와 비크라마쉴라의 위대한 대학들을 후원했다. 벵골어의 초기 형태인 전기 벵골어 역시 이 시기에 등장하였으며, 스리위자야, 토번, 아바스 칼리파국 등 주변국과의 왕래 또한 활발하였다. 팔라 제국의 통치 기간 동안 벵골과 중동 사이의 교역이 증가한 결과, 이슬람교가 처음으로 벵골 지역에 유입되었는데, 이는 아랍 역사가들의 기록뿐만 아니라 팔라 제국의 고고학 유적지에서 아바스 동전 등이 발견되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슬람 국가와 상업적, 문화적 교류가 빈번하였으며, 아바스 칼리파국의 수도 바그다드에 있는 지혜의 집은 이시기의 인도 수학과 천문학에 대한 지식을 받아들였다.[10]
9세기 초에 전성기를 맞았을 때 팔라 제국은 북부 인도 아대륙에서 지배적인 강국이었으며, 오늘날 파키스탄 동부와 북동부, 네팔과 방글라데시의 일부 지역까지 지배하고 있었다.[11] 팔라 제국은 다르마팔라 황제와 데바팔라 황제 치하에서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데바팔라 사후 팔라 제국은 라자스탄의 구르자라 프라티하라 제국, 데칸의 라슈트라쿠타 왕국과의 삼파전에서 패배하며 약세를 보였다. 마이팔라 1세는 촐라 제국의 침략에 맞서 벵골과 비하르에 있는 황성 방어에 나섰다. 팔라 제국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끈 황제인 라마팔라 때에는 카마루파와 동강가를 격파하였지만, 제국은 이전에 의해 상당히 약화되었고, 많은 지역이 반란에 휩싸였으며, 결국 1174년에 벵골의 힌두계 왕조인 세나 왕조에게 대체되며 멸망하였다. 팔라 제국 시대는 벵골 역사의 황금기 중 하나로 여겨진다.[12][13] 팔라 제국은 수세기 동안 교전하고 있는 분단간의 내전 끝에 벵골에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팔라 제국은 초기 벵골 문명의 업적을 발전시켰고 뛰어난 예술과 건축을 창조하였으며, 첫 번째 문학 작품인 차랴파다를 포함한 벵골어의 기초를 닦았다. 팔라 제국의 유산은 여전히 티베트 불교에 반영되어 있다.
기원
편집팔라 왕조의 기원이나 초기 역사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다. 역사학자들은 그들의 치세를 이해하기 위해 간접적인 증거에 의존하며, 그들의 조상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진다.[14] 칼림푸르 동판 명문에 따르면, 초대 팔라 왕 고팔라는 바파타라는 이름의 전사의 아들이었다. 라마차리탐은 바렌드라(북벵골)가 팔라의 조국(야나카부)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비록 나중에 기록에 따르면 고팔라는 크샤트리아이거나 전설적인 태양 왕조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지만,[15] 왕조의 민족적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발랄라-카리타에 따르면, 팔라인들은 크샤트리아였다고 하는데, 이 주장은 타라나타가 인도의 불교사에서, 그리고 가나람 차크라바티가 그의 다르마망갈라(둘 다 16세기에 쓰여졌다)에서 반복한 주장이다. 라마차리탐은 또한 제15대 팔라 황제 라마팔라를 크샤트리아라고 증명한다.[14] 니티쉬 센굽타에 따르면, 팔라가 전설적인 태양 왕조에 속한다는 그러한 주장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며 왕조의 초라한 기원을 은폐하려는 시도로 보인다.[16] 팔라 왕조는 또한 대방광보살장문수사리근본의궤경과 같은 일부 출처에서 수드라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15] 이 전통을 따르는 중세 작가 아불 파즐은 이 왕들을 카야슈타들로 묘사했다.[14][15][17] 사헤이에 따르면, "우리는 팔라도 카야슈타들로 주장할 수 있다."[18]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그들의 궁정이 요새가 되었고 동판이 불교적인 연고를 강조했기 때문에 팔라인들이 확고한 불교도였다고 믿는다.[14][17]
앙드레 윙크는 창시자 고팔라가 선출되었으며, "분명히 왕실 혈통이 아니라 크샤트리아로 변신한 브라만 계통일 것"이라고 언급한다.[17] 이와 유사하게, 11세기 페르시아 학자 알 비루니는 팔라 왕조의 통치자들이 브라만 출신이라고 언급한다.[19]
역사
편집가우다 왕국이 멸망한 후 벵골 지역은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중앙 권력이라고 할만한 왕국이 없었으며, 소규모의 왕국들 사이에 끊임없는 다툼이 있었다. 오늘날 인도에서는 이 시대를 "마차야니야(matsya nyaya)”- 물고기의 법"이라고 묘사하는데 이는 약육강식 즉,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먹는 상황을 뜻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팔라 1세를 시조로 하는 팔라 제국이 건국되었는데, 칼리푸르 동판의 기록에 의하면 이 지역의 권력가들이 그를 마하라자디라자(황제)로 추대하였다고 한다. 역사적 증거는 고팔라 1세가 그의 시민들에 의해 직접 선출된 것을 의미한다기보다, 봉건적 치세들의 집단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러한 선거는 그 지역의 당대 사회에서 꽤 흔했다.[20] 고팔라 1세의 황제 등극은 여러 독립적인 권력가들이 아무런 투쟁도 없이 그의 정치적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에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었다.[21]
팔라 제국은 고팔라 1세의 아들인 다르마팔라와 그의 손자 데바팔라 시기에 영토를 확장하며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다르마팔라는 처음엔 프라티하라 제국의 황제인 바타라자와 라슈트라쿠타 제국의 황제 드루바에게 패배하였으나 드루바가 라슈트라쿠타 제국의 수도인 만야케타로 귀환하자 카나우지를 점령한 다음 차크라유다를 카나우지의 왕으로 임명하였지만, 프라티하라의 황제인 나가바타 2세에 의해 카나우지를 다시 빼앗겼다. 다르마팔라는 나가바타 2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나 이후 라슈트라쿠타의 왕인 고빈다 3세와 동맹을 맺고 프라티하라를 공격하여 나가바타 2세를 물리쳤다.[22][23][24] 다르마팔라 사후 팔라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데바팔라는 팔라 제국의 가장 강력한 황제로 역사에 남아있다.[25] 데바팔라는 아삼 지역과 오디샤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26]
데바팔라 사후 팔라 제국은 점차 힘을 잃기 시작하였다. 데바팔라의 조카였던 비그라하팔라 1세는 짧은 통치 끝에 왕위를 버리고 고행자가 되었다. 비그라하팔라 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나라야나팔라 통치시기 팔라 제국은 더욱더 힘을 잃게 되었다. 나라야나팔라의 재위 기간 동안 라슈트라쿠타의 황제 아모가바르샤가 팔라 제국을 침략하여 격파하였다. 나라야나팔라의 아들 라지야팔라는 약 12년 동안 통치했으며, 여러 공공 시설과 사원을 건설했다. 그의 아들 고팔라 2세는 몇 년의 통치 끝에 벵골을 잃고, 그 후 비하르만을 다스렸다. 다음 왕인 비그라하팔라 2세는 찬델라 왕조와 칼라추리 왕조의 침략을 견뎌야 했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팔라 제국은 가우다, 라다, 앙가, 방가와 같은 소왕국으로 분열되었다. 하리켈라(동남부 벵골)의 칸티데바도 마하라자디히라자(황제)를 칭하였고, 이후 찬드라 왕조가 통치하는 별도의 왕국으로 분리되었다.[27] 가우다 지역은 캄보자계 팔라 왕조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 왕조의 통치자들 또한 접미사 –팔라(예: 라자야팔라, 나라야나팔라, 나야팔라)로 끝나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원은 불확실하며, 가장 신뢰성 있는 견해는 그들이 팔라 제국의 주요 부분을 침략하여 통치하면서 당시 그 지역에 남아있던 팔라 관리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이다.[28][29]
988년에 팔라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마히팔라는 북벵골과 동벵골, 버드완 사단 북부 지역을 수복하며 팔라 제국을 다시 부흥시키기 시작하였다. 그의 재위 기간 도중인 1021년부터 1023년까지 촐라 제국의 라젠드라 1세가 갠지스강 유역을 건너 벵골 지역의 국가들을 공격해 수많은 전리품들을 약탈해갔는데, 이때 마히팔라 1세 치하의 팔라 제국 역시 촐라 제국의 침공을 받았고 결국 패배해 라젠드라 1세에게 코끼리와 여자, 보물을 바쳤다.[30][31] 이후 라젠드라 1세가 촐라 제국의 본거지인 타밀라캄으로 귀환하자 마히팔라 1세는 가즈나 제국의 침공으로 타격을 입은 북인도 지역의 왕국들을 급습하여 비하르 및 바라나시를 정복하였다.
마히팔라 1세의 아들인 나야팔라는 오랜 투쟁 끝에 후칼라추리 왕 카르나(강게야데바의 아들)를 물리쳤다. 두 사람은 이후 불교학자 아티야자의 중재로 평화조약을 맺었다. 나야팔라의 아들 비그라하팔라 3세의 치세 때 카르나는 다시 한 번 팔라 제국을 침공했으나 패배하였으며, 비그라하팔라 3세는 카르나와 평화 협정을 맺은 후 카르나의 딸 요우바나스리와 결혼했다. 비그라하팔라 3세의 후계자인 마이팔라 2세는 짧은 영광을 누리고 단명하였다. 그의 치세는 라마차리탐에 있는 산디야카르 난디에 의해 잘 문서화되어 있다. 마히팔라 2세는 형제 라마팔라와 수라팔라 2세를 반란을 공모한 혐의로 감금하였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카이바르타지역의 족장들이 일으킨 반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디브야(Divya)라는 이름의 족장이 마히팔라 2세를 죽이고 바렌드라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이후 이 지역은 그의 후계자인 루다크와 비마가 장악했다. 디브야의 손자 비마를 상대로 라마팔라는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으며, 이로써 수라팔라 2세가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마히팔라 2세에 의해 갇혀있던 수라팔라 2세는 비하르 지역으로 탈출하여 짧은 통치를 한 뒤 죽었다. 수라팔라 2세는 라슈트라쿠타 제국의 황제이자 자신의 외삼촌인 마타나와 동인도 지역의 여러 지배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수라팔라 2세에 이어 황제가 된 라마팔라는 바렌드라 지역의 지배권을 얻음으로써 팔라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려 했다. 그는 팔라 제국의 수도를 라마바티로 옮겼으며, 세금을 줄이고 경작을 장려하며 공공사업을 실시했다. 그는 카마루파와 라르 지역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동벵골의 바르만 왕에게 그의 통치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그는 또한 오디샤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동강가 왕조를 공격하였으며, 가하다발라 왕조와 서찰루키아 왕조를 견제하기 위해 촐라 제국의 쿨로퉁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가하다발라 왕 고빈다찬드라가 팔라 제국을 공격하자 결혼 동맹을 통해 이를 저지하기도 하였다.[32][33][34]
이처럼 팔라 제국을 크게 부흥시킨 라마팔라 사후 팔라 제국의 왕위를 계승한 쿠마라팔라 치세에 카마루파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은 바이디야데바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쿠마라팔라가 죽은 후 바이디야데바는 팔라 제국에서 벗어나 사실상 별도의 왕국을 건설하였다.[35] 라마차리탐에 따르면 쿠마라팔라의 아들 고팔라 3세는 삼촌 마다나팔라에 의해 살해되었다. 마다나팔라의 통치 기간 동안, 동벵골의 바르만 왕조는 팔라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고, 동강가는 팔라 제국을 다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마다나팔라는 가하다발라에게서 뭉게르를 빼앗았으나, 남부 벵골 동부를 장악하고 있던 비자야세나에게 패배하였다. 1162년경에 고빈다팔라가 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팔라 제국을 지배했지만, 1174년에 벵골 지역의 신흥 힌두계 왕조인 세나 왕조에게 대체되면서 팔라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36]
지리
편집팔라 제국의 국경은 존재하는 동안 계속 변동했다. 팔라는 한때 북인도의 광대한 지역을 정복했지만 구르자라-프라티하라, 라슈트라쿠타 및 기타 덜 강력한 왕의 끊임없는 적대감으로 인해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었다.[37]
고팔라가 세운 원래 왕국의 정확한 경계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거의 모든 벵골 지역이 포함되었을 수 있다.[38] 팔라 제국은 다르마팔라의 통치하에 실질적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오늘날의 벵골과 비하르 지역을 직접 통치하였다. 카나우지 왕국(오늘날의 우타르프라데시)은 때때로 그의 지명자 차크라유다가 통치하는 팔라의 속방이었다.[38] 카나우지 왕좌에 지명자를 설치하는 동안 다르마팔라는 황실을 조직했다. 다르마팔라가 발행한 칼림푸르 동판에 따르면 이 궁정에는 보자(아마도 비다르바), 마츠야(자이푸르 지역), 마드라(동펀자브), 쿠루(델리 지역), 야두(아마도 마투라, 드와르카 또는 심하푸라), 야바나, 아반티, 간다라 및 키라(캉그라 계곡)의 통치자들이 참석하였다.[39][40] 이 왕들은 카나우지 왕좌에 차크라유다를 옹립하는 것을 받아들였고, 동시에 "그들의 왕관이 떨리는 가운데 정중하게 절했다."[41] 이는 팔라 제국이 마우리아 제국 또는 굽타 제국과는 달리 느슨했지만 대부분의 통치자가 주권자로서의 그의 지위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다른 통치자들은 다르마팔라의 군사적, 정치적 우위를 인정했지만 자신의 영토를 유지했다.[39] 구자라트의 시인 소달라는 북인도에 대한 그의 종주권 때문에 다르마팔라를 우타라파타스바민("북방의 제왕")이라고 부른다.[37]
비문 기록은 과장된 언어로 된 광범위한 정복으로 데바팔라를 인정한다. 그의 후계자 나라야나팔라의 바달 기둥 비문에는 그의 브라만 장관 다르바파니의 현명한 조언과 정책에 의해 데바팔라가 빈디야와 히말라야로 둘러싸인 북인도 전체 지역의 패자 또는 차크라바르티가 되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그의 제국이 두 대양(아마도 아라비아해와 벵골만)까지 확장되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데바팔라가 우트칼라(현재의 북오디샤), 후나족, 캄보자족, 드라비다족, 카마루파(오늘날의 아삼) 및 구르자라족을 물리쳤다고 주장한다:[38]
- 구르자라의 정체는 데바팔라에게 패한 미히라 보자였을 것이다.
- 후나 왕의 정체는 불확실하다.
- 캄보자 제후의 정체도 불확실하다. 캄보자라는 이름을 가진 고대 국가는 현재 아프가니스탄에 있었지만 데바팔라의 제국이 그렇게까지 확장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 비문에서 캄보자는 북인도에 들어온 캄보자족을 가리킬 수 있다(캄보자 팔라 왕조 참조).
- 드라비다 왕은 일반적으로 라슈트라쿠타 왕 아모가바르샤와 동일시된다. 일부 학자들은 드라비다 왕이 판디아의 통치자 슈리 마하 슈리 발라바일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드라비다"는 일반적으로 크리슈나강의 남쪽 영토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데바팔라는 찬델라 왕 비자야의 남부 원정에서 도움을 받았을 수 있다. 어쨌든 남쪽에서 데바팔라의 이득은 일시적이었다.
데바팔라는 또한 펀자브의 인더스강까지 군대를 이끌었던 것으로 여겨진다.[38]
그의 아들과 손자는 아마도 제국의 핵심 지역을 온전하게 유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붕괴되기 시작했다. 나라야나팔라는 아삼과 오리샤의 통제권을 잃었다. 그는 또한 마가다와 벵골 북부에 대한 통제권을 잠시 상실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고팔라 3세는 찬드라 국왕의 손에 심각한 역전을 겪었고 북부 벵골 일부에서만 통치했다. 팔라 제국은 비그라팔라 2세의 치세 동안 더 작은 왕국으로 분해되었다. 마히팔라는 벵골, 비하르 및 바나바시까지의 일부를 복구했다. 그의 후계자들은 다시 동쪽과 남쪽 벵골을 잃었다. 팔라의 마지막 명군인 라마팔라는 벵골, 비하르, 아삼 및 오리사 일부 지역을 장악했다.[38] 마다나팔라가 죽을 때까지 팔라 왕국은 북부 벵골과 함께 비하르 중부 및 동부 지역에 국한된 영토를 지녔다.[38]
행정
편집중앙
편집팔라 제국은 군주제였다. 팔라 황제는 모든 권력의 중심으로 파라메슈와라, 파람바타라카, 마하라지디라자와 같은 황제 칭호를 채택했다. 팔라 황제는 총리를 임명했다. 가르가 가문은 100년 동안 팔라의 총리를 역임했다.
- 가르가
- 다르바파니
- 소메슈와르
- 케다미스라
- 바타 구라브미스라
지방
편집팔라 제국은 여러 개의 부크티(주)로 나뉘었으며, 부크티들은 비샤야(구)와 만달라(군)로 나뉘었다. 더 하위의 행정 단위로 칸달라, 바가, 아브리티, 차투라카, 파타카가 있었으며, 행정부는 황실에서 변방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포함했다.[41]
팔라 동판에는 다음과 같은 행정직이 언급되어 있다.[41]
- 라자
- 라잔야카
- 라나카(하위 추장일 수 있음)
- 사만타와 마하사만타(봉신왕)
- 마하산디-비그라히카(외교부 장관)
- 두타(본부장 대사)
- 라자스타니야(대리)
- 아그가라크사(경비대장)
- 사스타디크르타(징세관)
- 차우롯다라니카 (경찰 징세관)
- 샤울카카(무역 징세관)
- 다샤파라디카(벌금 징세관)
- 타리카(하천 횡단을 위한 통행료 징수관)
- 마하크샤파탈리카(회계사)
- 졔스타카야스타(서기관)
- 크셰트라파(토지이용과장)와 프라마트르(토지측정과장)
- 마하단다야카 또는 다르마디카라(대법원장)
- 마하프라티하라
- 단디카
- 단다파시카
- 단다샤크티 (경찰)
- 콜라(비밀 서비스직).
- 가바다크샤와 같은 농업직(낙농장)
- 차가댜크샤(염소 농장의 우두머리)
- 메샤댜크샤(양 농장 대표)
- 마히샤댜크샤(버팔로 농장의 우두머리) 혹은 보그파티
- 비샤야파티
- 샤슈타디크루타
- 다우샤샤다니카
- 나카디야크샤
군사
편집팔라 제국의 최고 군직은 마하세나파티(대장군)였다. 팔라는 말라바, 카사, 후나, 쿨리카, 미틸라, 칸나타, 라타, 오드라 및 마나할리를 포함한 여러 왕국에서 용병을 모집했다. 동시대 기록에 따르면 라슈트라쿠타는 최고의 보병대를, 구르자라-프라티하라는 최고의 기병대를, 팔라는 최고의 코끼리 부대를 가졌다. 아랍 상인 술라이만은 팔라가 발하라(라슈트라쿠타)와 주르즈(구르자라-프라티하라)보다 더 큰 군대를 가졌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팔라군이 보급품을 공급하고 옷을 세탁하기 위해 10,000-15,000명의 남자를 고용했다고 말다. 그는 또한 전투 중에 팔라 왕이 50,000 마리의 전쟁 코끼리를 이끌 것이라고 주장한다. 술라이만의 설명은 과장된 보고서에 기반한 것 같다. 이븐 할둔은 코끼리의 수를 5,000마리로 언급한다.[41]
벵골에는 좋은 토종말이 없었기 때문에 팔라는 캄보자족을 포함한 외국인으로부터 군마들을 수입했다. 그들은 또한 상업 및 방어 목적으로 사용되는 해군을 지녔다.[41]
종교
편집불교
편집팔라는 대승불교의 후원자였다. 고팔라의 죽음 이후에 많이 쓰여진 몇몇 사료들에서는 그를 불교도라고 언급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42] 팔라 황제는 확실히 불교도였다. 타라나타는 고팔라가 오단타푸리에 유명한 승원을 지은 확고한 불교도라고 말한다.[43] 다르마팔라는 불교 철학자 하리바드라를 그의 영적 스승으로 삼았다. 그는 비크라마쉴라 수도원과 소마푸라 마하비하라를 세웠다. 타라나타는 또한 그가 50개의 종교 기관을 설립하고 불교 작가 하리바드라를 후원한 공로를 인정한다. 데바팔라는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의 여러 주제를 특징으로 하는 소마푸라 마하비하라의 구조를 복원하고 확장했다. 마히팔라 1세는 또한 사르나트, 날란다 및 보드가야에서 여러 신성한 구조물의 건설 및 수리를 명령했다.[38] 그에 대한 일련의 민요인 마히팔라 기트("마히팔라의 노래")는 여전히 벵골의 시골 지역에서 인기가 있다.
팔라는 비크라마쉴라 및 날란다 대학과 같은 불교 학습 센터를 개발했다. 기록된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대학 중 하나로 여겨지는 날란다는 팔라의 후원 아래 절정에 이르렀다. 팔라 시대의 저명한 불교 학자로는 아티샤, 산타라크시타, 사라하, 틸로파, 비말라미트라, 단쉴, 단스리, 지나미트라, 즈나나스리미트라, 만주고쉬, 무크티미트라, 파드마나바, 삼모가바즈라, 샨타라크쉬트, 실라바드라, 수가타스리 및 비라찬 등이 있다.
고타마 붓다 땅의 통치자로서 팔라는 불교계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자바의 사일렌드라 왕 발라푸트라데바는 데바팔라에게 대사를 보내어 날란다 수도원 건설을 위해 5개 마을의 보조금을 요청했으며,[44] 데바팔라는 이 요청을 승인하고 날란다 승원의 수장으로 브라만 비라데바를 임명했다. 불교 시인 바즈라닷타(로케스바라샤타카의 저자)는 그의 궁정에 있었다.[38] 팔라 제국의 불교 학자들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벵골에서 다른 지역으로 여행했다. 예를 들어 아티샤는 티베트 와 수마트라에서 설교했으며 11세기 대승불교를 전파한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시바교
편집팔라는 지속적으로 시바교를 후원했으며, 비석 증거에 따르면 마히팔라 1세와 나야팔라는 황실 교사에 의해 시바교도로 시작하였다. 비그라하팔라 3세의 아마가치 비문은 그를 "시바 숭배에 헌신했다"고 묘사하며, 이 전통은 그의 후계자 라마팔라 아래에서 계속되었다. 시인 산드야카르 난디는 라마팔라의 아들 마다나팔라를 시바의 신봉자로 묘사한다.
팔라는 일반적으로 골라기-마타와 관련된 시바파 고행자를 지원했다.[37] 불교 신들의 이미지 외에도 비슈누, 시바, 사라스바티의 이미지도 팔라 제국 시대에 만들어졌다.[45]
데바팔라는 시바의 배우자에게 바쳐진 사원을 지었고 마히팔라는 시바교 수도원을 후원했다. 팔라 황자에 의한 사르나트의 불교 건축물 개조를 기록한 서기 1026년 비문에는 마히팔라 1세가 바라나시에 시바, 치트라간타 및 기타 신들의 사원 수백개를 지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나라야나팔라의 방갈라푸르 비문은 그가 여러 시바 사원을 지었고 파슈파타파에게 마을을 부여한 것을 기록했음을 암시한다. 나라야나팔라는 또한 그의 브라만 장관의 희생제에 참석했다.[37] 나야팔라의 시얀 비문은 그가 시바와 그의 다양한 측면(예: 바이라바)를 위한 여러 사원과 나바두르가, 마트리카, 비슈누 및 락슈미를 위한 사원을 지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라난타가 불교 계율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야팔라가 불교의 가르침을 거부했을 가능성은 낮다.
마다나팔라의 황후 치트라마티카는 바테슈바라-스와미 샤르마라는 브라만이 마하바라타를 암송한 대가로 그에게 땅을 선물했다.[46]
문학
편집팔라는 여러 산스크리트 학자를 후원했으며 그중 일부는 관리였다. 가우다 리티 양식의 구성은 팔라 통치 기간 동안 개발되었다. 많은 불교 탄트라 작품은 팔라 통치 기간 동안 저작되고 번역되었다. 위의 종교 문단에서 언급한 불교 학자 외에도 지무타바나, 산디야카르 난디, 마다바-카라, 수레스바라 및 차크라파니 닷타는 팔라 시대의 다른 주목할만한 학자이다.[38]
주목할만한 팔라 철학서로는 가우다파다의 아그마 샤스트라, 스리다르 밧타의 니야야 쿤달리 및 밧타 바바데바의 카르마누슈탄 파다티가 있다. 의학서로는 다음이 포함된다.
- 차크라파니 닷타의 치키차 삼그라하, 아유르베다 디피카, 바누마티, 샤브다 찬드리카, 드라비야 구나상그라하
- 수레쉬와라의 샤브다 프라디파, 브릭카유르베다, 로파다티
- 방가세나의 치키차 사르삼그라하
- 가다다라 바이디야의 수슈라타
- 지무타바하나의 다야바가, 뱌보하라 마트리카, 칼라비베카
산드야카르 난디의 반창작 서사시 라마차리탐(12세기)은 팔라 역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팔라 시대 동안 구성된 챠라파다에서 원시 벵골어의 한 형태를 볼 수 있다.[38]
예술과 건축
편집팔라 제국의 조각예술은 인도 예술의 뚜렷한 단계로 인식되고 있으며, 벵골 조각가의 예술적 천재성으로 유명하다.[47] 팔라 제국의 예술은 굽타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48]
팔라 양식은 세나 제국 치하에서 계승되었고 계속 발전했다. 이 시기 동안, 조각의 양식은 "후굽타"에서 다른 지역과 후세기에 널리 영향을 미친 독특한 양식으로 바뀌었다. 신의 형상은 자세가 더 경직되어, 종종 곧은 다리를 가까이 대고 서 있었고, 종종 보석 등의 장신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많은 특성을 가지고 있고 진흙을 전시할 수 있는 관습인 여러 개의 팔을 가지고 있었다. 사원 이미지의 전형적인 형태는 실물 크기의 절반이 넘는 매우 높은 부조의 주 인물이 있는 슬래브이며, 작은 수행자들로 둘러싸여 있고, 더 자유로운 트리방가 포즈를 취할 수 있다. 비평가들은 그 양식이 지나치게 섬세한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조각의 품질은 일반적으로 매우 높고, 선명하고 정확한 묘사가 있다. 동인도에서는 얼굴 생김새가 날카로워지는 경향이 있다.[49]
이전 시대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유사한 구성의 작은 청동상들이 살아 남았다. 아마도 생산되는 숫자가 증가했을 것이다. 이것들은 대부분 부유한 사람들의 국내 신사와 승원에서 만들어졌다. 점차적으로 힌두인의 숫자가 불교인의 수를 넘어섰는데, 이는 인도 불교의 최후의 쇠퇴를 반영하며, 인도 불교의 마지막 거점인 동인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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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샤와 카르티케야 옆에 있는 트리푸라 순다리의 현무암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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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된 샹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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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슈누의 아바타라 중 하나인 바라하의 조각상
앞서 언급했듯이, 팔라는 많은 승원들과 다른 신성한 건축물들을 지었다. 오늘날 방글라데시의 소마푸라 마하비하라는 세계 문화 유산이다. 이 대승원은 21에이커(8.5헥타르) 규모로 177개의 세포와 수많은 부도, 사원 및 기타 부속 건물이 있는 대승원이다. 비크라마실라, 오단타푸리, 그리고 자갈다라를 포함한 다른 비하라의 거대한 구조물들은 팔라의 다른 걸작들이다. 이 구조물들은 바흐티야르 칼지의 군대에 의해 요새화된 성으로 오인되어 파괴되었다. 팔라와 세나 왕조 시기 비하르와 벵골의 예술은 네팔, 버마, 스리랑카 그리고 자바의 예술에 영향을 주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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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화 유산인 소마푸라 마하비하라는 다르마팔라에 의해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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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마푸라의 중앙 신사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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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크라마쉴라 유적
역대 황제
편집- 고팔라 1세 (Gopala I, 재위 750 - 770)
- 다르마팔라 (Dharmapala, 재위 770 - 810)
- 데바팔라 (Devapala, 재위 810 - 850)
- 마헨드라팔라 (Mahendrapala, 재위 850 - 854)
- 비그라하팔라 1세 (Vigrahapala I, 재위 854)
- 나라야나팔라 (Narayanapala, 재위 854 - 920)
- 라지야팔라 (Rajyapala, 재위 920 - 952)
- 고팔라 2세 (Gopala II, 재위 952 - 969)
- 비그라하팔라 2세 (Vigrahapala II, 재위 969 - 995)
- 마히팔라 1세 (Mahipala I, 재위 995 - 1043)
- 나야팔라 (Nayapala, 재위 1043 - 1058)
- 비그라하팔라 3세 (Vigrahapala III, 재위 1058 - 1075)
- 마히팔라 2세 (Mahipala II, 재위 1075 - 1080)
- 슈라팔라 (Shurapala, 재위 1080 - 1082)
- 라마팔라 (Ramapala, 재위 1082 - 1124)
- 쿠마라팔라 (Kumarapala, 재위 1124 - 1129)
- 고팔라 3세 (Gopala III, 재위 1129 - 1143)
- 마다나팔라 (Madanapala, 재위 1143 - 1162)
- 고빈다 팔라 (Govindapala, 재위 1162 - 1174)
같이 보기
편집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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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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