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태 (조직폭력배)
김영태(한국 한자: 金永泰, 1920년 1월 16일~2010년 11월 7일)는 일제 시대의 유도인 출신의 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 겸 조직폭력배, 정치 깡패였다. 1939년경부터 김두한(金斗漢)의 부하였고, 별동대원 등으로도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1946년, 김태영(한국 한자: 金泰永)으로 개명하였다.
김태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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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출생 | 1920년 1월 16일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진위군 |
사망 | 2010년 11월 7일 미국 뉴욕 주 올버니 | (90세)
거주지 | 브라질 상파울루 주 상파울루 |
국적 | 대한민국 |
본관 | 수안 |
직업 | 유도인, 사회 운동가, 조직폭력배, 정치 깡패 |
학력 | 일본 제국 도쿄 다이세이 고등학교 졸업 |
부모 | 중농가 농지주였던 아버지 중농가 안주인이던 어머니 |
형제 | 2남 1녀 중 막내 |
배우자 | 아내 있었음 |
자녀 | 1남 2녀 |
친척 | 김재호(친조부) |
활동 정보 | |
활동 기간 | 1938년~1973년 |
경력 | 우익 관련 성향 별동대 대원 출신 |
그는 일찍이 6세 남짓 시절이던 1925년 3월에, 할아버지 김재호(金在湖, 1869년생~1941년졸)의 일본인 친구 되는 이였던, 히로나카[1] 간타쿠조(廣中 干拓城, 광중 간척성, 1872년생~1937년졸)라는 자의 배려 등으로 인하여, 일가족들과 함께 가내 농토 등을 모두 팔고, 일본 제국 기후 현 에나에 유학하여, 훗날 1932년 3월, 일본 제국의 기후 현 에나 다이세이(대성)소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8년 3월, 일본 제국의 도쿄 다이세이(대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두달이 지난 후 같은해(1938년)의 5월에 일가족들과 함께 약13년2개월여만에 경성부로 귀국했다. 1939년경부터 김두한(金斗漢)의 부하로 있었던 그는, 2년여 훗날 일제 강점 시대의 경기도 인천부 제물포 미추홀에서, 1941년 6월 8일 향년 73세로 하세한 할아버지(김재호)로 하여금, 조부상[2] 및 장례 등을 치렀으며, 1945년 8월 15일 광복(을유 해방)이 도래한 이후 이듬해 1946년, 김태영(한국 한자: 金泰永)으로 개명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초반기 당시부터 같은해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전투 승전 때까지 내무부 장관 조병옥(趙炳玉)의 민간 연락 요원 등으로, 석달동안 참전하였었다.
1973년에는 브라질의 상파울루라는 도시로 첫 이민을 갔다. 그러다가 1981년에는 미국의 뉴욕주의 올버니라는 지역으로 마지막 이민을 갔으며, 수십여년 후 그 곳에서 사망했다.[3]
김영태가 등장한 작품
편집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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