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문화어: 상해림시정부[1], 영어: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19년 4월 11일 ~ 1948년 8월 15일)는 1919년 3월 1일 경성(京城)에서 선포된 3·1 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대한민국의 망명 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2]에서 설립되었으며,[3] 같은 해 9월 11일에는 경성(서울)과 러시아 연해주 등 각지의 임시 정부들을 통합하여 상하이에서 단일 정부를 수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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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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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 대한독립만세 (大韓獨立萬歲) | |||
국가 | 애국가 |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목상 영토 | ||||
수도 | 서울(명목상 수도) 임시정부 소재지 상하이 1919-1932 항저우 1932-1935 자싱 1935 난징 1935-1937 창사 1937-1938 광저우 1936-1939 치장 1939-1940 충칭 1940-1945 서울 1945-1948 | |||
정치 | ||||
정치체제 | 민주공화정 -의원내각제 (1919) -대통령제 (1919~25) -의원내각제 (1925~27) -집단지도체제 (1927~40) -주석제 (1940~48) | |||
임시 대통령 국무령 주석 부주석 | 이승만 (1919~25) 이동녕 (1927~33) 김구 (1940~47), 이승만(1947~48) 김규식(1940~47) | |||
입법부 | 임시 의정원 | |||
역사 | ||||
• 독립선언 • 임시헌장 공포 및 상해임시정부 수립 • 한성정부 수립 • 임시정부 통합 • 임시헌법 공포 • 한국 광복군 창설 • 대일선전포고 • 광복 • 정부수립 선포 및 임시정부 해산 | 1919년 3월 1일 1919년 4월 11일 1919년 4월 23일 1919년 9월 11일 1919년 9월 11일 1940년 9월 17일 1941년 12월 10일 1945년 8월 15일 1948년 8월 15일 | |||
지리 | ||||
면적 | 220,951 km2 | |||
인문 | ||||
공용어 | 한국어 | |||
인구 | ||||
1919년 어림 | 약 20,000,000(3월 1일 기준) | |||
경제 | ||||
통화 | 원(圓)[출처 필요] | |||
기타 | ||||
현재 국가 | 대한민국 |
1919년 4월 11일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고,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하였다.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입법·행정·사법의 3권 분리 제도를 확립하였다. 대한제국의 영토를 계승하고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명시하였다. 초대 임시 대통령은 이승만이 맡았으나 탄핵되었고, 이후 김구가 주석을 맡았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하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 한국 광복군 조직 등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지원하였고, 중국 국민당, 소련, 프랑스, 영국, 미국 등으로부터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후 김구 등 임시 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였으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해산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이었던 이승만은 1948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87년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대한국민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였다.
국호
대한제국의 계승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고종 황제가 창안한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1919년 4월 10일 임시 정부의 첫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국호를 정하기 위해 회의를 할 때 신석우가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국호를 정하자고 하니, 여운형이 '대한'이라는 이름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또 다시 '대한'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그러자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라고 부연 설명을 하며 대한제국에서 황제의 나라를 뜻하는 '제국'(帝國)을 공화국을 뜻하는 '민국'(民國)으로 바꾸어 대한민국을 국호로 제안하였고, 다수가 공감함에 따라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4]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제정한 대한민국 임시 헌장 제8조와 통합임시 정부가 출범하면서 같은 해 9월 11일 위 임시헌장을 개정한 대한민국 임시 헌법 제7조에 공히 "대한민국은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밝히고, 제3조에 "대한민국의 영토는 구한국(=대한제국)의 판도로 한다"고 명시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대한제국을 계승함을 다시 확인하였음.
대한민국으로 승계
임시 정부가 사용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해방 후 1948년 7월 소집된 제헌국회가 새 나라의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면서 그대로 채용되었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을 계기로 12월 29일 9차 개헌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였다.
정부 수립 과정
정부 수립의 준비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설립되었다.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돌자, 3월 1일 고종 황제의 장례식(인산일[5])을 계기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조선이 독립국가임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전국 각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조선 인구 2천만명 중 3.1 만세 시위 참가자는 약 202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했으며, 사망자 7,500여명, 부상자 16,000여명, 체포·구금된 사람이 46,000여명이었다. 만세 시위는 3월부터 시작하여 5월까지도 격렬하게 지속되었는데,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일제 경찰에 연행·구금되어 사실상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3·1 운동으로 표출된 독립 의지를 대표할 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국내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었다. 1919년 3·1 운동 후 독립운동을 계속 확대해 나가기 위해 국내외에서 정부수립계획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순종이 건재하고 있어서 망설이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상하이에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결집되어 있었다.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한 이들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거듭했다. 먼저 임시 정부 수립론이 대두되었는데, 조선총독부에 맞서 민족의 망명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러나 여운형 등은 정부를 조직하기에는 시기가 이르다고 보고 당 조직을 제대로 갖추고 난 뒤에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이것은 먼저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에 묻혔다.[6]
상하이는 교통이 편리하고 쑨원이 이끄는 광동정부의 지원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조계[7]가 있어서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건도 갖추고 있었다. 독립지사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우호적인 프랑스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조계에 살면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런 까닭에 독립지사들이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1918년 조직된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상하이는 3·1 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하였다.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1919년 여름부터 더욱 민활하게 움직였다. 신규식을 비롯하여 서병호, 여운형, 조동호, 박찬익, 선우혁 등은 한국과 만주, 연해주, 미주에서 몰려드는 지사를 맞이하기에 바빴다.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프랑스 조계를 중심으로 외지에서 온 사람들의 숙소를 마련해 주고 고려교민 친목회를 조직하여 교민 상호간의 긴밀한 연락망을 만들었다. 이 무렵 만주와 연해주의 이동녕, 이시영, 김동삼, 신채호, 조성환, 조소앙 등 명망 높은 독립지사가 상하이로 와서 자리를 잡았고, 한국에서 현순, 손정도 등이 이곳으로 파견되었다.[8]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받을 것을 결의하고 김규식 등을 대표단으로 파견하였다. 김규식은 어릴 때부터 언더우드 학당에 다니면서 영어, 라틴어, 신학, 수학, 과학 등 서구식 교육을 받았고, 서재필이 만든 《독립신문》 기자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유학하여 로노크 대학교 학사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석사를 받은 인재였다. 특히 그는 어학에 능통하여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는 물론이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몽골어, 산스크리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신한청년당의 이름으로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의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고, 1919년 1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명의로 된 탄원서를 제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아직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을 거절당했다. 김규식은 공식적으로 한국 정부의 대표라는 신임장을 받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은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9]
출국 전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독립 시위를 벌일 것을 주문하였다.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 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10]
김규식은 프랑스 파리에서 신한청년당과 전파통신으로 교신하였고, 신한청년당은 로비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여 송금해 주었다. 김규식의 주장에 고무되어 신한청년당은 국내에 사람을 파견하여, 함태영, 조만식 등의 민족지도자를 만나기도 했다.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는 배를 타고 국내에 잠입하여 애국부인회 결성을 추진하였다. 함태영을 만나 국내 독립운동 방법을 의논하였으나 체포되어 투옥될 경우 해외에서 활동하는 남편의 활동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함태영의 설득으로 김순애는 다시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김규식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만세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9]
정부 수립 주체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당시의 참여자는 신한청년당 대표인 김규식[11]과 신한청년당원인 여운형, 손정도, 조소앙, 김철, 선우혁, 한진교, 신석우, 그리고 현순, 신익희, 조성환, 이광, 최근우, 백남칠, 김대지, 남형우,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진희창, 신철, 이영근, 조동진, 김동삼 등 30인이었다. 그 밖에 김구, 이동녕, 신규식 등이 설립에 참여하였고,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 등이 1919년 4월에서 9월 사이에 임정의 영수로 임명되어 상하이로 출입하였다.
정부 수립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에서 각 지역의 교포 1천여 명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이 모여 밤새 논의를 시작했다. 이튿날인 1919년 4월 11일 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채택한 뒤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했다.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하고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군무총장에 이동휘, 재무총장에 최재형, 법무총장에 이시영, 교통총장에 문창범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4월 11일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12][13][14] 그 후 4월 22일에는 2차 의정원 의원 57인이 참석하여 국내의 8도 대표와 러시아, 중국, 미주 등 3개 지방대표가 각각 지방선거회를 통해 의정원 의원을 선출했다. 의장에는 이동녕, 부의장에는 손정도를 선출했다. 의정원은 법률안 의결, 임시대통령 선출 등 국회와 같은 기능을 했다.
이에 앞서 1919년 3월 17일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고, 뒤이어 4월 23일 경성(서울)에서 한성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통합문제를 제기하였다. 통합 교섭은 대한국민의회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현실적으로 국내와는 연락을 할 수 없었고 미국에 있는 이승만과도 상의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대한국민의회의 대표로 선정된 원세훈이 상하이로 와서 교섭을 벌였다. 양쪽 모두 정부의 위치를 자기 지역에 두되 산하의 부서만 양쪽에 배치하자는 주장을 폈다. 두 주장이 팽팽히 맞섰지만 그에 못지않게 단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열망도 높았다.[15] 결국 1919년 9월 11일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경성(서울)의 한성 임시 정부는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통합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한국, 중국, 러시아에 흩어져 있던 여러 독립운동단체와 국내외 한국인들을 대표하는 단일한 통합 정부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한제국 인사들의 참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는 구 대한제국 인사들도 참여하였다. 대한제국 시절 황해도 관찰사와 충청남도 관찰사를 지낸 김가진(金嘉鎭)은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 조선귀족령에 의해 남작(男爵) 작위를 받은 고위직 관료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 이후 대동단이라는 비밀 독립 조직을 결성하고 총재를 맡았다. 그는 1919년 10월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고문 겸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고문을 맡았다.
김가진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다섯째 아들이자 한 때 황태자 후보로 거론되었던 의친왕 이강을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탈출시킬 계획을 세우고 실무 준비를 하였다. 의친왕 이강은 밀서를 보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 의사를 표시하였다. 의친왕 이강은 1919년 11월 중국 상하이에 있는 임시 정부로 탈출하기 위하여 상복 차림으로 변복하고 만주 안동현에까지 갔으나, 일본군에 발각되어 체포된 후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의친왕이 임시 정부에 보낸 밀서 내용은 1919년 11월 20일자 독립신문 기사에 실렸다.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임시 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를 원한다. - 1919년 11월, 대한제국 의친왕 이강
정치 활동과 독립운동
초기 활동
초기 임시 정부는 내무총장 안창호의 주도로 연통제(국내의 비밀행정조직망)와 교통국(임시 정부 통신 기관)을 조직하는 한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으며, 각종 외교 선전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또한, 애국공채 발행과 국민의연금을 통해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였다.
1919년 7월 임시 정부는 국제연맹 등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을 편찬하기로 하고, 7월 7일 정부령으로 국무원 내에 '임시사료편찬회'를 설치하였다. 임시사료편찬회는 총재 안창호, 주임 이광수, 간사 김홍서와 위원 8명 및 조역 22명 등 총 33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9월 23일 4편 4책으로 된 사료집을 완성하여 출판하였다. 총 100질을 출판하였는데, 이 중 1질이 미국 콜롬비아대학 극동도서관에 완질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16]
초기 임시 정부 내부에는 이념적 갈등이 존재했다. 이승만과 안창호가 독립운동의 방략 상으로 대립하였으며, 이념적으로도 국무총리인 이동휘는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었고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여 서로 충돌하였다. 임시 정부 내의 사회주의자들끼리도 서로 뭉치지 못하고, 안병찬,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이르쿠츠크파와 이동휘를 중심으로 하는 상하이파, 그리고 김준연을 중심으로 하는 엠엘파(ML)로 나뉘어 갈등을 빚었다.
1920년 12월 8일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을 위해 상하이로 들어오자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의 독단적인 구미 위원부 설치 건과 국제연맹 위임 통치 건에 반대하였는데, 특히 러시아 연해주 거류 동포사회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가 임시 정부에 통합되며 그들의 대표로 국무총리가 된 이동휘는 미국교포의 독립자금을 축내며 외교운동으로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이승만이 대통령을 맡는 것에 대하여 반대한다며 국무총리 직을 사임하였다.
이동휘가 사임하고, 이승만에 반대하는 신채호 등이 이탈하자 임시 정부는 혼란에 빠졌다. 안창호는 코민테른 자금을 임시 정부에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이동휘는 고려공산당을 만드는 데 이 자금을 사용하여 이승만을 견제하였다. 이승만은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 불가해지자 다시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반임시 정부적인 군사통일 촉성회의 국민대표회의 개최 주장이 호응을 얻자 임시 정부는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하여 안창호와 김규식이 내각에서 사퇴하였다.
창조론, 개조론 논쟁
1921년 임시 정부는 소련의 레닌으로부터 혁명자금 200만 루블을 지원받았는데, 그가 보내온 40만 루블과 20만 루블을 수령한뒤[17][18], 자금분배 과정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동휘는 한형권, 김립을 보내 60만루블을 수령해 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동휘 등은 임시 정부에 지원금을 납부하지 않았고, 이에 김구는 이동휘 일파를 추격하여 김립을 암살하고 이동휘, 한형권 등을 비롯한 임시 정부 내 사회주의자들을 모두 추방하였다.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5개월 동안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각지의 200여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임시 정부의 해체와 재건을 주장하는 신채호 등의 창조파와 임시 정부의 개혁을 주장하는 안창호 등의 개조파로 분열되어 결국 아무런 결실을 얻어내지 못하였으며, 내무총장 김구는 유명무실해진 국민대표회의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후 재중국청년동맹, 주중국청년동맹 두 공산계열 단체가 경쟁했으며, 좌우 통일을 위하여 안창호 등에 의해 유일독립당촉성회가 결성되었으나 사회주의 계열과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산되는 등 양자의 분열을 거듭하였다.
일본에 대한 정치공작
임시 정부에서 심어둔 공작원들은 여러 번 일본 영사관이나 조선총독부의 문건을 빼돌리기도 했다. 이들 공작원들은 목숨을 걸고 적지에 침투하여 조선총독부의 자료들을 빼돌렸고, 총독부나 일본 영사관 내에 근무하는 친일파들을 설득, 포섭하여 문건을 빼돌렸다.
청산리 전투 직후 일본군의 문건 내용을 청취한 박은식은 이러한 사실을 자신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남겼다. '우리 사령부의 조사 보고에 의하면 적군(일본군)의 사상자가 천6백여 명이었고, 중국 관청의 조사에 의하면 일본군의 사상자는 천 3백여 명이었다.[출처 필요] 일본 영사관 비밀 보고서에 의하면 이도구 전투들에서 카노 연대장, 대대장 2명, 소대장 9명, 하사 이하 군병 사망자가 9백여 명이라고 하였다.[출처 필요]'라고 기록했다. 이범석 역시 일본군의 기밀을 훔쳐낸 사실을 자신의 회고록 우둥불에 기록하였다.
“ | 도전이 말 등에 실고 있던 마대 속에 드른 쇠통 속에서 우리는 휘황찬란한 빛나는 금쪼각 같은 귀중한 물건을 찾아냈으니, 그것은 도전이가 쓴 지 얼마 안되는 보고서로 봉투에 부친 풀이 아직도 채 마르지 않은 채로 있었다. 이것은 가납 연대장에게 보고하는 문건이었으나 도리혀 우리에게 적정을 알게 하는 좋은 보고가 되었다.[19] | ” |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많은 임정 파견원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집단지도체제와 위기
1925년 이승만이 임시의정원을 통해 대통령 직에서 탄핵되고, 뒤이어 취임한 박은식은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친 뒤 사임하였으며, 초대 국무령 이상룡이 서간도에서 상하이로 왔지만 내각 조직에 실패하여 다시 서간도로 돌아갔다. 그 뒤, 1925년 2월 양기탁을 국무령에 천거하였으나 사퇴하였고 5월 안창호를 국무령으로 천거하였으나 사양하여 의정원의장 이동녕이 국무령을 맡게 되었다. 홍진이 제3대 국무령으로 뽑혀 진강으로부터 상하이에 와서 취임하였으나 역시 내각 조직에 실패하였다.
1927년 12월 이동녕의 권유로 김구가 국무령에 선출되었으며, 김구는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였다. 1928년 이동녕을 국무령으로 추대하고 김구는 내무부를 맡아 임시 정부의 실질적인 지도권을 행사하였다.
1921년 이후 임시 정부는 상하이와 국내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했던 연통제, 교통국과 같은 국내 비밀행정 조직망이 파괴되고, 외교 선전활동의 무성과, 심각한 재정난 등으로 오랜 침체기를 겪었다. 인원도 줄어들어 초창기에 천여 명에 달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수십 명으로 감소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밀정을 파견하여 임정 요인에 대한 체포, 납치, 암살 공작을 단행하였고, 김희선, 이광수, 정인과 같은 자들은 친일파로 변절하여 국내로 돌아가버렸다.
한인애국단과 임시정부의 노력
김구는 국내, 만주와 연락이 되지 않자 미주 동포들에게 편지를 써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다. 시카고의 김경이 이끄는 공동회, 하와이의 안창호를 비롯한 여럿, 미주에서는 국민회를 중심으로 김호 등, 멕시코의 김기창과 이종오, 쿠바의 임천택 등, 동지회의 이승만을 비롯한 여럿이 모금에 참여해 주었다. 이러한 미주 동포들의 호응을 바탕으로 1931년 김구는 보다 직접적인 항일 투쟁을 추진하기 위해 특무 조직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김구는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을 시켜 히로히토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암살에는 실패하였다. 또한 이덕주와 유진식을 국내로 파견하여 조선총독 암살을 지시하였으며, 유상근과 최흥식을 만주로 파견하여 관동군 사령관, 관동청 총재 등의 암살을 지시하였다. 이어 상하이사변이 터지고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승전기념 및 천장절 행사가 열리자 윤봉길로 하여금 폭탄을 던지게 하여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비롯한 일본군 고관들을 암살하였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의 주모자로 수배된 김구는 상하이를 떠나서 숨어 지내야 했으나 남경으로 옮긴 중화민국 정부는 이를 계기로 김구와 임시 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되었다. 피신한 김구는 1933년 중화민국의 장제스를 만나 항일전선 협력에 합의한다.
이 무렵에 양기탁이 1933년 국무령에 선출되어 1935년까지 재직한다. 1933년 3월 6일 제25회 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의 사표 제출 문제는 조소앙 (외무)·조완구(내무)·김철(재무) 3명의 경우 수리하고 이동녕(법무)·김구(군사)는 반려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따라서 집단지도체제에 따라 국무위원을 11명으로 증원하였다. 유임된 이동녕·김구 외에 이유필(면직) ·조성환(무임소)·이승만(무임소)·윤기섭(군사, 김구 후임)·김규식(외무, 신익희 후임 6. 21)·차이석(내무)·최동오(법무)·신익희(외무)·송병조(주석) 9명이 국무위원으로 추가 보궐 선임되었다.[20]
1934년 1월 3일 국무위원 개선에 앞서 송병조 주석의 정무와 예산 관계의 정무 보고가 있었다. 여기서 신익희와 윤기섭의 사표가 수리되어 국무위원이 11명에서 9명으로 축소 결정되었다. 후보 12명을 선거한 결과 양기탁(주석)·송병조(재무)·조소앙(내무)·김규식(외무)·윤기섭(군무)·최동오(법무)·김철(무임소)·조성환(무임소)·성주식(무임소) 등 9명이 당선되었다.[21]
그러나 중일전쟁의 발발로 임시 정부는 항주와 진강, 장사, 광주 등을 거쳐 1940년 충칭으로 본거지를 옮기게 된다. 충칭에 자리잡은 임시 정부는 중국 국민당의 도움을 받아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941년 연합군에 가담하여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22] 일본에 선전포고하지만 한국 광복군이 미처 국내로 들어가기 직전에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한 노력
1935년 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통합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노선의 갈등으로 두 달 만에 분열되었다. 이후 임시 정부를 비롯하여 중국의 독립운동 진영은 둘로 나뉘게 되었는데, 하나는 김규식과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이었고 다른 하나는 임시 정부의 김구와 조소앙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이었다. 임시 정부는 가흥의 남호에서 임시 국무회의를 가져 민족혁명당의 통합운동으로 해체 위기까지 갔었던 임시 정부의 조직을 회복하는 것을 결의하였다.
1939년 8월 좌익 진영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청년전위동맹과 민족주의진영인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표들이 기강의 영산호텔에 모여 통일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통합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조선청년전위동맹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이 이탈하였고, 9월에 나머지 5 당 대회가 속개되었지만 의견을 일치를 보지 못하고 조선민족혁명당이 이탈하였다. 결국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을 비롯하여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 요인들이 결집함으로써 한국독립당으로 통합이 이루어졌다. 1940년 임시 정부는 국무위원제를 주석제로 개편한 뒤 한국독립당의 김구를 주석으로 추대하였다.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 정부에 합류하게 되면서 김규식이 부주석에, 김원봉이 군무부장 겸 한국 광복군 부사령에 선임되었다.
국제사회를 향한 외교적 노력
1919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이승만은 미국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김규식은 프랑스 파리에서 전승국의 추인하 독립을 추진하였다. 임시 정부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중국과 폴란드로부터 승인을 얻어내었다.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미국·영국은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인정하였지만, 그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도 임시 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23] 단, 미국 정부에서는 승인하지 않았지만 미국 의회에서는 임정을 승인하였다.[24] 한편 1944년 임정은 소련으로부터의 승인을 받았다.[25] 다음 해 1945년 4월 임시 정부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임시 정부 외무부장 조소앙은 충칭 주재 프랑스 대사를 만나 임정을 비공식적으로, 그리고 사실상(De facto) 승인한다는 말을 전달받았다.[26]
한국광복군 창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39년 1월 8일 창립된 임시 정부의 여당 한국독립당 당군(黨軍)을 모태로 하고, 이후 기타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여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을 준비, 계획하였다. 임시 정부는 194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여 지청천을 총사령으로, 이범석을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1942년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였으며, 충칭에 조선의용대를 포함한 1지대를 두고 서안과 부양에 각각 2지대와 3지대를 설치하였다. 임시 정부와 한국독립당, 그리고 한국 광복군의 일체 비용은 미주, 멕시코,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부담하였으며,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이 이끄는 부녀위로총회에서 중국돈 10만원을 기부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 정부는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하였다. 한국 광복군은 조선의용대와 마찬가지로 창설 이래 군 통수권이 한동안 중국 국민당이 집권한 중화민국 정부 아래에 있었으나, 김구의 노력으로 1945년 회복할 수 있었다. 1943년 한국 광복군의 일부 대원이 영국군에 파견되어 인도·버마 전선에서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다.
임시 정부는 미국 OSS(미국 전략 사무국)의 도노반 소장과 교섭하여 한국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비밀리에 국내에 침투하여 미군과 함께 공동 작전을 수행하는 '독수리 작전'으로 알려진 서울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다. 작전에 따라 사전트 소령이 이범석과 함께 서안 2지대에서 광복군에게 비밀 특수훈련을 실시하였으며, 윔쓰 중위는 김학규와 함께 부양 3지대에서 훈련을 실시하였다. 훈련은 3개월 동안 실시되었으며, 1945년 8월 마침내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편성된 국내정진군의 선발대가 국내의 요소 파괴 및 일본군 교란의 공작 임무를 받아 서해안으로 침투할 준비를 마쳤으나 안타깝게도 침투 직전 일본이 항복하면서 시행되기도 전에 좌절되고 말았다.
해방 정국의 임정
1945년 8월 16일 충칭에서 해방 소식을 전해들은 임시 정부의 요인들은 환국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임시 정부 내에서도 임정의 유지 문제를 놓고 우파와 좌파 간에 격렬한 대립이 있었다. 1945년 8월 15일부터 좌파는 국내외 단체와 민중의 기초 위에 임시 정부를 다시 세우자는 취지에서 임시 정부의 총사직을 요구한 반면, 한독당 측은 임시 정부를 가지고 귀국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미국과의 교섭 실패
8월 30일 충칭의 임정 대표들은 미국 대사관을 방문하여 미국식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기독교 신자가 많은 자신들이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의 대거 입국 때문에 희망을 잃고 있으며, 미국의 도움으로 입국한다면 미 점령군이나 혹은 국무성의 의사에 반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망록을 남기기도 했다.[27][28]
그러나 한반도의 남부에 진주한 미군정은 임시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개인 자격으로의 귀국과 미군정의 질서 확립에 협력한다는 조건 하에 환국을 허용하였다.[29] 1945년 9월 3일 김구는 임정 국무회의의 명의로 발표된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하였다. 당면과제에 의하면 ‘임정 환국→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전국적 보통선거 실시→정식정부 수립’등 임시 정부에서 정규 정부수립 방안을 제시하였다. 김구는 정부 자격으로 귀국을 원하였으나 미군정의 존 하지 사령관은 이를 거부하고 개인 자격으로의 귀국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김구를 비롯한 임시 정부의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환국하였다.
귀국하기 전 중국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 둥비우(董必武)가 임정 국무위원을 초청해 송별연을 하였고, 김구 일행이 충칭을 떠나기 하루 전인 11월 4일 중화민국 정부에서는 장제스(蔣介石)와 그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 임정 국무위원과 한국독립당 간부와 각계 요인 2백 명을 초청하여 환송회를 열어주었다. 장제스는 격려연설을 하는 가운데 "조선이 독립하지 못하면 중국의 독립도 완성하지 못하게 되고 동아시아와 세계 평화도 확보하지 못할 것이므로... 국민당은 조선독립에 전력을 다해 원조하겠다"고 말해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장제스의 이러한 한국 독립 지지 태도는 미국으로 하여금 중국이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역사적 지위의 회복을 바라고 있다는 판단을 갖게 함으로써 후일 미군정이 임시 정부를 철저히 냉대하게 만든 요인이되기도 했다.[30] (→ 장제스 참조)
임정 요인의 귀국과 환영
임시 정부 환국 제1진은 11월 5일 중경을 출발하여 상해에 도착한 뒤 잠시 상해에 머물렀다.[31] 임시 정부 환국 제1진이 김포비행장에 도착한 것은 11월 23일 오후 4시 40분이었다.[32] 당시 임시 정부는 귀국을 놓고 서로 먼저 가겠다고 하였으나 민족혁명당계 김원봉의 양보로 김구와 한국독립당 계열이 제1진으로 먼저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시 민족혁명당의 당수였던 김규식도 한국독립당계와 함께 귀국했다. 이때 귀국한 인사는 아래와 같다.
귀국 직후 김구 일행은 미군의 보호를 받았으며, 김구의 경호원들도 무기를 소지하도록 허용되었다.[33]
12월 1일 임시 정부 봉영식이 서울에서 열렸다. 서울 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 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으며,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이인을 통해 주석 김구에게 전달되었다.[34] 한편 미군정에서도 1백만환의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런데 이 중 일부는 일부 임정 요인들의 유흥비로도 쓰였는데, 장준하는 자신의 저서 《돌베개》에 귀국 후 임정요인들이 명월관, 국일관 등에서 주지육림 속에서 놀아나며 허송세월을 보낸다며 이를 지적하였다.
(金 九(主席) 金奎植(副主席) 李始榮(國務委員) 金尙德(文化部長) 嚴恒燮(宣傳部長) 柳東悅(參謀總長)(隨員) 鮮于鎭 安美生 閔泳琬 柳振東 李永吉 白正甲 張俊河 尹慶彬 金振東
귀국 직후
11월 4일 김구는 광산재벌 최창학이 제공한 경교장(京橋莊)에 머무르며, 경교장을 김구 자신의 사저 겸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로 활용하였다. 한편 친일파 배제 문제를 놓고 논란이 지속되자 김구는 환국 연설에서 "악질분자의 건국사업 참여 배제에는 찬성하나 이를 사전에 처리하고 갈 것인지, 통일 후에 처리할 것인지 결과적으로는 전후가 동일하다. 다만 아직 구체적 사정을 알 수 없으니, 추후 언급하겠다"며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였다. 그는 먼저 배제하고 건국하는 것과 건국 후에 배제하는 것의 결과가 전후가 동일하다고 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국내에 정치 기반이 없던 김구는 최창학, 강익하, 조선일보의 사주 방응모 등을 후견인으로 삼았다. 1945년 12월 1일 임시 정부 환국 환영대회 후 송진우, 장택상 등이 임정을 방문하여 환국지사후원회가 모금한 9백만원을 임시 정부 경비로 써달라고 전달했다. 다음날 저녁 김구는 이 돈을 재정부장 조완구에게 전달하였는데, 조완구는 친일파의 돈이라고 거절하였다. 이에 김구는 송진우를 불러 자금을 되돌려주었고, 신익희는 친일파 척결을 주장하며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송진우는 이 돈은 국민이 정부에게 바치는 세금이라며, 가난한 자, 부자, 도둑, 범죄자 가릴 것 없이 모든 국민의 돈을 세금으로 받는 것이 정부라며 설득했다. 결국 임정은 헌납 형식으로 이 돈을 받았다.
주요 활동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까지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였다.
- 1945년 8월 16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광복군 소속의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의 선발대가 미군 비행기를 타고 한반도로 향했지만 "가미카제 특공대가 아직 연합군을 공격하고 있다"는 무전을 받고 회군하였다.
- 1945년 8월 18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환국을 결정하였다. 같은 날 이범석이 이끄는 국내정진군이 다시 국내 진입을 시도해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이 둘러싸고 저항하여 부득이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 1945년 9월 3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석을 맡고 있던 김구는 국무위원회의 명의로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하였다. 이 발표에 의하면, 임시 정부는 환국 후 각계 대표들로 구성된 회의를 소집하여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임시 정부의 모든 것을 과도정권에 인계한다는 방침이었다. 즉, '임정 환국→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전국적 보통선거 실시→정식정부 수립' 등의 순서였다.
- 1945년 11월 2일 중화민국 정부의 장제스(蔣介石)와 그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과 한국독립당 간부와 각계 요인 2백 명을 초청하여 귀국 환송회를 열어주었다.
- 1945년 11월 3일 미군정이 제공한 비행기를 이용하여 김구 등 임정 요인 제1진이 상하이에서 서울로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김구는 경교장(京橋莊)에 머무르며, 경교장을 김구 자신의 사저 겸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로 활용하였다. 존 하지 미군 중장은 김구를 "조선을 극히 사랑하는 위대한 영도자"로 묘사했다.
- 1945년 12월 1일 서울운동장[35]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 개선대회가 열렸으며, 이날 대회에는 10만 명이 운집하였다.
- 1945년 12월 26일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에서 한국에 대해 신탁통치를 결의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임시 정부는 즉각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하였다. 이어 4개국 원수(元首)에게 보내는 결의문을 채택하여 발송하는 한편, 정당·종교·언론 등 각 단체 대표들과 비상대책회의를 개최하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하고 반탁투쟁을 주도하였다.
- 1945년 12월 31일자로 신익희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무부장 이름으로 제1호, 제2호 포고문을 발표하여 반탁운동을 벌였다. 미군정은 이 포고문을 보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으려는 '임시 정부의 쿠데타'라고 규정하고, 즉각 신익희를 체포하여 신문을 했으며, 이승만과 김구에게 미군정청 존 하지가 경고를 보냈다.
- 1946년 1월 8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1년에 이미 채택, 공포된 대한민국 건국강령(建國綱領)을 발표하고, 일제 때 관료를 지낸 인물들까지 흡수하여 임시 정부 산하조직인 행정연구위원회를 설치하고, 미군정청으로부터 정권을 접수하고자 했으나, 중도파와 좌파 진영의 반대로 실패했다.
- 1946년 2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내무부(장관 신익희) 산하에 정치공작대 조직을 확대하여 전국의 면 단위까지 조직을 완료하여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켰다. 또한 과도정권 수립을 위해 각계 인사 195명을 규합하여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였다.
- 1946년 2월 조중서 등 대한민국 임시 정부 정치공작대가 김구-신익희-염동진의 지시를 받은 백의사와 연계하여 김일성에게 폭탄 투척 계획을 세우고, 실제로 평양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김일성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여 소련군 소위가 오른팔이 잘려나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 1946년 8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측은 미군정에 반대하면서 한국의 통치권을 즉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측에 넘기라는 유인물을 뿌리고, 특별정치부대를 동원하여 미군정청이 있었던 정부 건물을 접수하여 독립정부를 수립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하였다. 하지만, 내부 밀고자에 의해 쿠데타 계획이 미군 CIC에 넘어감으로써 쿠데타가 좌절되었다.
- 1947년 3월 1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법통정부로 봉대할 것을 국민의회에 건의하였고, 같은 날 우익계 청년단체인 전국학생총연맹(全國學生總聯盟)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봉대(奉戴)를 결의하였다.
- 1947년 3월 3일 이승만이 제21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취임했다. 그동안 주석을 맡아왔던 김구가 부주석을 맡았다.[36][37] 김규식, 장건상, 김붕준(金朋濬) 등 중도우파 국무위원은 보선에서 배제되었다.[38]
- 1947년 9월 5일 제22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회 선거에서 주석 이승만, 부주석 김구가 재선임되었다.[39]
-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남북협상파였던 김구 계열이 5.10 남한 단독 총선거에 불참하였고, 이승만의 독립촉성회 계열이 최다 당선자를 배출하였다.
- 1948년 7월 20일 제헌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에 의해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임정 해산
해방 이후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한반도의 38도선 이남과 이북에 미.소의 군정이 들어섰고,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한 임정은 3년간의 신탁통치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47년 10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없이 결렬되어 38도선 이남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총선을 거쳐 7월 17일 제헌의회가 헌법을 제정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단독으로 공식 수립됨으로써 임시 정부는 해산하였다.
법통 논란
광복 직후부터 좌익들에 의해 임시 정부가 정통성이 있는가, 독립운동단체를 대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임정법통론을 받아들인 세력은 당시 대중의 지지가 약한 한민당 등 보수세력이었다.[40]
1945년 12월부터는 한민당과 김구를 중심으로 임정법통론이 제기되었다. 임시 정부의 법통에 대해선 이견이 존재했다. 임시 정부의 지도자 중 한사람이었던 김구나 이승만은 각각 적극적, 소극적으로 임정의 법통성을 주장하였다. 1946년 1월 8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1년에 이미 채택, 공포된 대한민국 건국강령(建國綱領)을 발표하였다. 한편 임정은 내무부 산하에 국내의 행정권력을 장악하고자 일제하에서 대부분 고등문관시험을 합격하고 조선총독부 치하에서 관료를 지낸 인물들을 흡수하여 임정 산하조직인 행정연구위원회를 설치하여 임정의 집권에 대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조선인민공화국을 해산한 것처럼 임정 역시 해산하고 새로운 임시 정부를 구성하자는 중도파와 좌파 진영의 반대에 부딛쳐 정권 접수는 어렵게 된다.
1946년 2월부터 북한에서는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 북한에서 별도의 정부수립 움직임이 감지되자 임시 정부는 북한의 조선공산당 고위 관리들을 제거하기 위해 임시 정부 정치공작대와 비밀결사 백의사가 연계하여 1946년 3월 임정 정치공작대원 김정의·최기성 등을 파견해 최용건을 제거하기 위해 그의 집을 습격했으나 실패했다.[41] 1947년 3월 1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법통정부로 봉대할 것을 국민의회에 건의하였고, 같은 날 우익계 청년단체인 전국학생총연맹(全國學生總聯盟)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봉대(奉戴)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1947년 12월 장덕수의 암살 사건을 계기로 임정의 지도 세력은 분열, 김구는 분단된 대한민국 정부의 임정 법통 계승에 부정적이었다.
- 대한민국 헌법 전문과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제1대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함을 천명하고 연호를 민국 30년으로 기산하였다. 1987년 12월 29일 9차 개헌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 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하여,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고 명시되어 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여러 독립운동단체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냐, 아니면 독립운동단체들의 '대표'이면서 '정부'로 봐야 하느냐는 논란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와 국사편찬위원회는 대한민국 헌법에는 대한국민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되어 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정부였고, 독립운동단체들의 대표였다고 보고 있다. 대한민국의 초중고교 역사 교과서에서 임시 정부를 한민족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국 정부라고 기술하고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입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는 임시 정부를 부르주아 집단으로 간주하여 독립운동 단체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 조선공산당의 소견
1945년말 임정 환국 직전 조선공산당은 임시 정부의 공헌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체제하에서 악전고투하며 구사일생해온 것은 노농대중이며, 이들이 민족해방의 주체라고 주장하였다. 즉, 국내 혁명세력을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에 두고 인공이 그것을 이어받았다는 이유를 들어 임정 추대에 반대하였다.[42][43][44]
- 여운형의 소견
여운형도 임시 정부의 법통성을 반대하였다. 임시 정부의 공헌은 어느 정도 인정하는 조선공산당과 달리 여운형은 몇가지 점에서 중경 임정 추대에 반대하였다.[43][45]
- 임시 정부는 30년간 해외에서 지리멸렬하게 유야무야 중에 있던 조직이니 국내에 기초가 없어 군림이 불가하다는 점
- 연합국한테 승인되지도 될 수도 없다는 점
- 미주(美洲), 연안, 시베리아, 만주 등지의 혁명단체 중에는 임시 정부보다 몇 배가 크고 실력 있고 맹활동한 혁명단체가 있으며 그네들 안중에는 임시 정부가 없다는 점
- 국내에서 투옥되었던 혁명지사가 다수인데 , 안전지대에 있었고 객지고생만 한 해외 혁명가 정권만을 환영하는 것은 잘못된 점이라는 점
- 중경 임정을 환영하는 자들은 아무런 혁명 공적이 없는 자들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려는 것이고 건준의 정권수립권(權)을 방해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
- 중경 임정만을 환영하는 것은 해내해외의 혁명단체의 합동을 방해하고 혁명세력을 분열시키는 과오라는 점
- 박헌영의 소견
박헌영은 1945년 11월 23일에 임시 정부 주요 요인들이 귀국했을 때 박헌영은 12월 12일자로 발표된 '망명정부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성명에서 임시 정부를 '망국정부'라 지칭하고 임시 정부요인들을 '망국인사'라 지칭하며 그들의 권력욕과 패권주의를 비난한다는 주요 내용을 발표했다.[46]
- 허헌의 소견
허헌은 '임시 정부가 주최하는 비상국민회의를 염두에 두며 법통이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무엇이 법통이며 법통을 주장하는 자가 누구며 김구 일파가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47]
- 임정의 국제적 지위
임정 당시 임정이 소재했던 중화민국이 전략적 측면에서 인정하였으며 임정의 활동을 지원하였으나 군사적 문제에서 전적으로 중국 정부의 통제지휘가 있었다. 설립 당시 국가의 3요소인 영토, 주권, 국민이 부재했기 때문에 해방후 38선 이남을 점령한 미국의 미군정은 임시 정부를 국가의 정부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2019년 4월 10일, 한미동맹 결의안 발의 중, 미 의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건국의 시초로 공식인정하는 결의안을 추진했다.[48][49] 실제 법안 통과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역대 수반
대통령
- 1대 이승만 1919년 9월 11일 ~ 1922년
- 이승만 1922년[50] ~ 1925년 3월 21일)
- (대리)이동녕 1924년 6월 16일 ~ 1924년 12월 11일)
- (대리)박은식 1924년 12월 11일 ~ 1925년 3월 24일
- 2대 박은식 1925년 3월 24일 ~ 1925년 9월 26일
국무총리
- 1대 이승만 1919년 4월 11일 ~ 1919년 4월 23일
- 2대 이동녕 1919년 4월 23일 ~ 1919년 6월 28일
- (대리)안창호 1919년 6월 28일 ~ 1919년 8월 27일
- 3대 이동휘 1919년 8월 27일 ~ 1919년 9월 11일
- 이동휘 1919년 9월 11일 ~ 1921년 3월
- (대리)이동녕 1921년 3월 ~ 1921년 5월 16일
- 4대 신규식 1921년 5월 16일 ~ 1922년 6월
- (대리)노백린 1922년 6월 ~ 1923년 1월
- 5대 노백린 1923년 1월 ~ 1924년 4월 9일
- (대리)김구 1923년 4월 9일 ~ 1924년 4월 23일
- 6대 이동녕 1924년 4월 23일 ~ 1924년 6월
- 7대 박은식 1924년 6월 ~ 1924년 11월
- 박은식 1924년 11월 ~ 1925년 3월 11일
- 8대 노백린 1925년 3월 11일 ~ 1925년 9월
- (임시)이윤영 1948년 7월 23일 ~ 1948년 7월 31일
- 9대 이범석 1948년 8월 1일 ~ 1948년 8월 15일
국무령
- (임시대리) 이유필 1925년 9월 ~ 1925년 9월, 내무부총장, 석주 이상룡 부임 직전 임시 국무령대리 겸임,
- 1대 이상룡 (1925년 9월 ~ 1926년 1월)
- 양기탁 (1926년 1월 ~ 1926년 4월 29일 (선출됐으나 거절)[51])
- (대리) 이동녕 (1926년 4월 29일 ~ 1926년 5월 3일) (임시의정원 의장)
- 안창호 1926년 5월 3일[52] ~ 1926년 5월 16일[53]
- (대리) 이동녕 (1926년 5월 16일 ~ 1926년 7월 7일 (임시의정원 의장)
- 2대 홍진 (1926년 7월 7일 ~ 1926년 12월 14일)
- 3대 김구 (1926년 12월 14일 ~ 1927년 8월)
(1927년 국무령제 폐지, 1930년 국무령제 부활)
국무회의 주석
- 1대 이동녕 (1927년 8월 - 1930년 10월)
- 2대 이동녕 (1932년 12월 - 1933년)
- 3,4대 송병조 (1934년 1월 - 1936년 11월 10일)
- 5대 이동녕 (1936년 11월 - 1939년 10월 22일)
- 6대 이동녕 (1939년 11월 - 1940년 3월 13일)
- 7대 김구 (1940년 - 1940년 10월 8일)
- 8대 김구 (1944년 10월 - 1944년 4월)
- 9대 김구 (1944년 4월 - 1947년 3월)
- 10대 이승만 (1947년 3월 - 1947년 9월)
- 11대 이승만 (1947년 9월 - 1948년 8월 15일)
국무회의 부주석
임시 정부 유적지
상하이 임시 정부 유적지는 1919년부터 1932년까지 13년간 상하이 임시 정부 시절 머물렀던 곳이다. 임정은 1932년 4월 29일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일어나자, 일본군을 피해 항저우를 비롯한 중국 6개의 도시를 유랑하다 일제 말기인 1940년에는 충칭으로 이전하였다.
상하이 유적지는 마땅루 306농 4호에 자리 잡고 있으며, 신티엔디(新天地)와 가까워 이곳에서 걸어가면 된다. 오래된 건물이 붙어 있는 건물에서 1층과 2층에 유물을 전시하고, 비디오를 보며, 설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다. 내부에는 주요 인사들의 사진과, 태극기 등의 유물, 백범 김구의 집무실, 각 부처의 집무실 등이 있다.
임시 정부는 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에 따라 다음과 같이 이동을 하였다.
- 상하이(上海, 상해): 1919년 4월 11일 ~ 1932년 5월
- 항저우(杭州, 항주): 1932년 5월 ~ 1932년 10월
- 전장(鎭江, 진강): 1932년 10월 ~ 1932년 11월
- 난징(南京, 남경): 1932년 11월 ~ 1937년 11월
- (피난) 자싱(嘉興, 가흥): 1935년 10월 ~ 1936년 2월
- 창사(長沙, 장사): 1937년 12월 ~ 1938년 7월
- 광저우(廣州, 광주): 1938년 7월 ~ 1938년 11월
- 류저우(柳州, 유주): 1938년 11월 ~ 1939년 5월
- 치장(綦江, 기강): 1939년 5월 ~ 1940년 9월
- 충칭(重慶, 중경): 1940년 9월 ~ 1945년 11월 23일
- (피난) 구이린(桂林, 계림):
같이 보기
각주
- ↑ “《상해림시정부》”. 2019년 4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4월 4일에 확인함.
- ↑ 상하이는 1919년 당시에 중화민국에 속해 있었으나, 현재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해 있다.
- ↑ “‘제국’에서 ‘민국’으로…임정, 세계 첫 ‘민주공화제’ 새기다”. 한겨례신문사. 2019년 4월 11일.
- ↑ 송승표, 《우리가 몰랐던 우리 역사: 나라 이름의 비밀을 찾아가는 역사 여행》{{깨진 링 크|url=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385157 }}, 학민사, 2013년 12월 10일.
- ↑ 인산일(因山日)이란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왕과 왕비, 태상왕(太上王)과 그 비(妃), 왕세자와 그 빈(嬪), 왕세손(王世孫)과 그 빈의 장례일을 말한다.
- ↑ 같은 책, 23~24쪽
- ↑ 조계란 외국인이 행정자치권이나 치외법권을 가지고 거주한 조차지를 말한다.
-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3쪽
- ↑ 가 나 《한국독립운동사사전,3-7 :운동·단체편(4),p 337~ p 339》,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저
- ↑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69쪽 참조
- ↑ 김규식은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모태인 신한청년당의 대표이자, 1919년 3~4월 각지에서 상하이, 노령, 조선민국, 한성정부 등의 임시 정부 수립의 시발점이 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 중이었다.
- ↑ 같은 책, 24~25쪽
- ↑ 4월 13일? 11일? 臨政 진짜 생일은
- ↑ 4월11일? 4월13일?…학계 임정수립 기념일 논란
- ↑ 같은 책, 27쪽
- ↑ 한시준,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 Archived 2019년 3월 30일 - 웨이백 머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년
- ↑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창작과비평사, 1994) 49쪽
- ↑ 김구, 《백범일지》(돌베개, 2003) 311쪽
- ↑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1991 여름》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사, 2007) 401페이지
- ↑ 이현희, 《광복 전후사의 재인식》 (범우사, 1991) 214페이지
- ↑ 이현희, 《광복 전후사의 재인식》 (범우사, 1991) 215페이지
- ↑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에 승인받진 못하였다.
- ↑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62페이지
- ↑ 43년 美의회에서 상해임정 승인결정
- ↑ 한국민속대백과사전,국립민속박물관
- ↑ 같은 책, 93페이지
- ↑ 같은 책, 122쪽.
- ↑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역사비평사, 1991) 275쪽.
- ↑ 김삼웅, 《한국현대사 뒷얘기》(가람기획, 1995) 121쪽.
- ↑ “秘錄 韓國外交<5> : 건국전야 (4)”. 경향신문. 1975년 1월 22일. 및 여기서 인용한 손세일 저, 《이승만과 김구》
- ↑ <<자유신문>> 1945년 11월 5일, <金九 주석, 5일 重慶 출발 잠시 上海 체제>.{{|ur|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10&page=1&pre_page=1&setId=-1&prevPage=1&prevLimit=&itemId=npfp&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npfp_1945_11_05_v0001_0060&position=-1}}
- ↑ <<서울신문>> 1945년 11월 24일, <중경임정요인 환국과 군정청 발표>틀: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 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d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dh 001 1945 11 23 0190&position=-1
- ↑ 일월총서 71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옮김, 최옥자펴냄, 일월서각) 2001년판 253~254쪽
- ↑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45
- ↑ 서울운동장은 1985년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 ↑ 한배호 (2000년 5월 10일). 《「한국현대정치론」본문 中 3. 우익의 재분열》. 오름. 113쪽. ISBN 89-7778-1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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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 pp 360~361
- ↑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 pp 360~361
- ↑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 pp 360~361
- ↑ 이는 장준하의 회고에도 자세히 나온다. 장준하 회고에 의하면 '임정 요인들이 귀국하자 친일세력 및 한민당 세력에서 잘 부탁드린다.'며 요리집, 술집에서 온갖 융숭한 대접을 했다고 한다.
- ↑ 최용건 - Daum 백과사전
- ↑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266페이지
- ↑ 가 나 강준만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119페이지
-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119~121쪽.
- ↑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273페이지
- ↑ <박헌영 평전>안재성 지음. p.263
-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26쪽.
- ↑ “US Lawmakers Submit Resolution Recognizing Korea's Provisional Gov't” (영어). 2019년 4월 1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4월 12일에 확인함.
- ↑ 수정: 2019.04.11 21:38:57, 입력: 2019 04 11 13:09:00 (2019년 4월 11일). “[임시정부 100년]“임시정부, 대한민국 건국의 토대” 미 상·하원 모두 공식 인정 결의안”. 2019년 4월 12일에 확인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1922년 임시 정부 제3기 정부 구성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에 유임되었다.~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7 : 임시 정부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179페이지
- ↑ 대한민국 임시 정부 30년사(이연복 지음 | 국학자료원 | 2006) 39페이지
- ↑ 이연복, 《대한민국 임시 정부 30년사》(이연복 지음, 국학자료원, 2006) 39페이지
- ↑ “::::: 평화 전문 인터넷 신문 [평화만들기] :::::”. 2011년 11월 2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2월 6일에 확인함.
- ↑ http://www.kimgu.or.kr/menu_2/index.html
- ↑ “보관된 사본”. 2016년 3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7월 7일에 확인함.
참고 자료
- 고성진 (2008년 7월 15일). “'뉴라이트는 근대화 신화에서 깨어나라!' - 임정기념사업회 등, 건국 60년 세미나서 '임정 정통성' 강조”. 플러스코리아(PlusKorea). 2016년 3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7월 25일에 확인함.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2》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대한민국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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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대 | 대한민국 임시 정부 1919년 9월~1948년 8월 15일 (군정기 1945년 9월 ~ 1948년) 조선인민공화국 1945년 9월 ~ 1946년 2월 |
다음 시대 |
대한제국 |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