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귀스타브 로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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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구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년]] ~ [[1882년]]) [[프랑스]]의 해군 제독이다. [[병인양요]] 때 [[조선]]의 [[강화도]]를 공격을 지휘한 인물이다.
 
== 개요 ==
프랑스<!--의 Mimes--> 출신으로 해군 장교로 복무하는 것으로 그의 일생을 바쳤다. 젊은 해군 소장(부재독)으로서 로즈는 [[프랑스 - 멕시코 전쟁]]([[1862년]]에 발발)이 일어나는 동안 동안 멕시코에서 복무를 했다. [[1865년]]에는 프랑스 극동 기지 사령관(Station des mers de Chine)으로 임명되어 본부가 있는 요코하마에서 사령관 업무를 수행했다.
 
== 병인양요 ==
{{본문|병인양요}}
[[1866년]] 음력 9월에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병인박해]])와 [[통상수호정책]]을 구실로 [[강화도]]를 공격하여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프랑스 군함 3척을 이끌고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 3명의 안내로 오늘날의 인천 앞바다에 다다랐으며, [[음력 9월 18일]](양력 [[10월 25일]]) [[한성부]]([[서울]]) 근교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 일대에 진출했다. 이로 인해 서울 도성은 공포와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급히 어영대장 [[이용희 (1811년)|이용희]]를 파견하여 한강 연안 경비를 강화하였다. 프랑스 함대에서는 3척의 소(小)함대로써 도성의 공격이 곤란함을 깨닫고, 그 부근의 지형만 정찰하고 [[음력 9월 25일]]에 [[청나라]]로 물러났다. 이 후 [[음력 10월 11일]]에는 [[프리깃함]] [[게리에르]](Guerrière)를 포함한 7척의 군함과 [[일본]]의 [[요코하마]]에 주둔해 있던 해병대 300명을 포함한, 도합 800명가량의 해병대를 동원해 다시 [[강화도]] 부근의 [[물치도]](勿淄島) 근처로 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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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로즈는 이 이상의 교전이 불리함을 깨닫고 [[음력 11월 18일]] 프랑스군은 1개월 동안 점거한 강화성을 철거하여, 성내의 관아에 불을 지르고 약탈한 은괴와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청나라]]로 철군했다.
 
== 병인양요 이후의 삶 ==
이 후 [[1867년]] [[1월 13일]] 일본 요코하마로 돌아갔으며, [[1868년]]에 프랑스로 소환되었다. [[1869년]]에 부제독으로 임명되었으며, 해군 본부 협의회(Conseil d'amirauté)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Préfet Maritime de la Manche et de la Mer du Nord'''<!--불어를 아시는 분은 이를 번역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1869년]]에서 [[1871년]]([[보불전쟁]] 기간과 겹침)까지 그가 브르타뉴 연안을 경비했던 그의 위치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1875년]]에는 지중해의 소함대 사령관(Escadre de la Méditerranée)으로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