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보나리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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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카보나리를 카르보나리로 고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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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원래 어디에 세워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ref name=":4">Kirsch 1908.</ref> 나폴레옹 전쟁 때 나폴리 왕국에서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 조직의 문서 중 일부에서 이들이 중세 프랑스에서 생겼으며<ref name=":2" /> 창시자들이 16세기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의 후원 하에 있었다고 하지만 이 주장에 대한 그밖의 다른 근거는 없다. 카르보나리의 기원에 관한 많은 이론들이 제기되었지만<ref>예를 들어, <The sufis>라는 책의 "숯쟁이"라는 장에서 이드리스 샤(Idries Shah)는 카르보나리 당의 기원에 대해 폭넓은 조사를 하였다. 그는 "감지자"(The Perceivers)라는 수피 그룹과 아랍어를 통해 언어적으로 관련되었음을 보인다. (Shah, Idries (1977) [1964]. The Sufis. London, UK: Octagon Press. p. 178–179. <nowiki>ISBN 0-86304-020-9</nowiki>.)</ref> 이 조직은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프리메이슨]]으로부터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처음에 그들은 ([[조아킴 뮈라]]의 지배하에 있는) 나폴리 왕국에서 그리고 리소르지멘토에 적대적이었던 [[교황령]]에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ref name=":3" />
보수적인 정부로부터 탄압 받는 비밀 결사로서 카르보나리 당은 대체로 비밀리에 운영되었다. 카르보나리라는 이름 때문에 당원들은 시골의 "숯쟁이"로 인식되었다. 그들이 만난 장소를 "바라카"(''baracca)''라고 하였고, 당원들끼리는 "좋은 사촌"이라고 부르며,
카르보나리의 목적은 입헌군주제 즉 공화국의 창설이었다. 그들은 또한 모든 형태의 절대주의에 맞서 평민의 권리를 보호하기를 원했다.<ref name=":5">Kirsch 1908.</ref> 카르보나리는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장 반란을 선동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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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보나리 당은 프랑스 점령에 대한 저항 과정에서 처음 발생했는데 특히 보나파르트주의 나폴리 왕인 조아킴 뮈라의 지배하에서 번성하였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두드러진 반오스트리아 성향을 가진 민족주의 조직이 되었고 1820-1821년과 1831년 이탈리아에서 혁명을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20년 혁명은 나폴리에서 [[페르디난도 1세 (양시칠리아)|페르디난도 1세]]에 대항하여 시작되었다. 같은 해 스페인 카디스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폭동이 나폴리에서 일어나 반-전제주의 목표를 설파하였고 자유주의 헌법을 요구했다. 7월 1일, 두 명의 장교인 모렐리(Michele Morelli)와 실바티(Joseph Silvati)(굴리엘모 페페 장군이 이끄는 뮈라 군대의 일부였다)는 기병 연대 선두에서 캄파니아의 놀라(Nola) 마을을 향해 진군했다.
이 시위로 불안해진 페르디난도 왕은 새로운 헌법과 의회의 수립에 동의하였다. 비록 부분적이고 환상적이며 표면적이지만 이 승리는 이탈리아 반도에 많은 희망을 안겨주었고 산토레 디 산타로사가 이끄는 지역 공모자들은 [[사르데냐 왕국]]의 수도 토리노를 향해 진격했고 1821년 3월 12일
1821년 9월 13일, [[교황 비오 7세]] 는 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Ecclesiam a Jesu Christo)>''에서 카르보나리를 프리메이슨의 비밀 결사라고 비난하고 그 구성원들을 파문했다.<ref>Alan Reinerman, "Metternich and the Papal Condemnation of the" Carbonari", 1821." ''Catholic Historical Review'' 54#1 (1968): 55-6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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