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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고전후 시대||유럽 이외의 다른 지역의 역사}}
{{각주 부족}}
[[파일:JuengeresMathildenkreuz.jpg|섬네일|upright=1.15|에센의 수도원장 마틸데를 위해 만든 십자 모양의 보석인 마틸데 십자가가 에나멜 판에 새겨진 성모 마리아와 어린이 앞에 무릎을 꿇은 모습이 그려져 있다.
독일 에센 대성당 국고]]
'''중세'''(中世, {{lang|la|Medium aevum}})는 [[유럽의 역사|유럽 역사]]에서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년)하고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4세기-6세기)이 있었던 5세기부터 [[르네상스]](14세기-16세기)와 더불어 [[근세]](1500년-1800년)가 시작되기까지의 5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시기이나 이 개념은 동양사에는 적용하기 어렵고 유럽 이외 지역에 '중세'가 있었는지도 학자에 따라 의견이 상충하지만 유럽 이외 지역에 '중세'가 없었다는 지극히 유럽 중심주의적인 의견도 존재한다.
[[로망스어군]]의 역사학자들은 중세를 전기(High)와 후기(Low)로 양분한다. [[독일어]]권과 [[영어]]권의 학자들은 일반으로 중세를 [[중세 초기|초기]]{{.cw}}[[중세 성기|성기]]{{.cw}}[[중세 후기|후기]]의 세 시대로 나눈다.<ref name="Power">Power, Daniel (2006). 《The central Middle Ages: Europe 950–1320》. The short Oxford history of Europe (illustrated ed.). Oxford University Press. pp. 304 {{ISBN|978-0-19-925312-8}}.</ref> 벨기에의 역사가인 [[앙리 피렌]]([[:en:Henri Pirenne|Henri Pirenne]]: 1862-1935)과 네덜란드의 역사가인 [[요한 하위징아]](1872-1945)는 20세기 초에 다음의 세 시대 구분을 대중화하였다. (아래 연표도 이들의 구분에 따른 것이다
* 중세([[:la:Medium aevum|Medium aevum]]): 476-1453 (약 천년)<br />(476년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때이고, 1453년은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때이다.)
** [[중세 초기]](Early Middle Ages): 476-1000 (약 5백년)
** [[중세 성기]](High Middle Ages): 1000-1300 (약 3백년)
** [[중세 후기]](Late Middle Ages): 1300-1453 (약 150년)
== 역사 ==
=== 고대 후기 ===
{{본문|고대 후기}}
한때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라 호언하던
=== 중세 초기 ===
{{본문|중세 초기}}
[[파일:Charlemagne denier Mayence 812 814.jpg|섬네일|150px|[[카롤루스 대제]]가 새겨진 [[데나리우스]]. ]]
7세기에
이 무렵의 유럽에서는 점차 [[장원 (봉건제)|장원제]]가 보급됨과 아울러 지배자와의 사이에 주종 관계가 일반화하기 시작하여 [[봉건제]]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장원의 지역적 집중이 이루어짐으로써 나중에 영주권이 강화되어 왕권과 대립하게 되었고, 따라서 지방분권화 경향을 나타냈다. 한편, 교회도 이른바 교회령을 가지게 되며, 이 무렵에는 그 권력이 세속의 영주와 다를 바 없게 됨으로써 여기서 중세의 소위 2원적 지배체제가 성립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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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성기 ===
{{본문|중세 성기}}
또한 이 시기에는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가톨릭 교회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종교계의 지배자인 가톨릭 교황의 권력이 강대해졌으며, 이에 세속계의 최고 권력자인 신성 로마 황제와의 사이에 권력투쟁이 전개되었다. 성직의 서임을 둘러싸고 [[교황 그레고리오 7세|법황 그레고리 7세]]와 [[하인리히 4세]] 사이에 벌어졌던 정면 충돌은 그 두드러진 예였다. 이 충돌의 결과로 헨리 4세는 [[카노사의 굴욕|카노사에서 그레고리 7세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는 교황권이 절대적인 것으로 된 반면에 속세의 황제권은 점차 쇠퇴되었으며, 이와 같이 강대한 교황권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권 국가가 회교권 국가에게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 [[십자군]]의 원정으로 나타났다. 회교도들에게 점령된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과 동로마 구원의 명분을 가졌던 십자군 원정은
=== 중세 후기 ===
{{본문|중세 후기}}
[[파일:Doktorschnabel 430px.jpg|섬네일|150px|[[흑사병 의사]]. [[흑사병]]의 유럽 유입 경로는 여러 가지가 거론되고 있으나 [[몽골 제국|몽골]] 침략이 유력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13~14세기에는 [[당나라|당]]에 밀린 [[셀주크 투르크|셀주크 투르크족]]의 서방 진출이 십자군 운동을 유발해 4차 십자군이 마침내 동맹국인
유럽에서는 [[십자군]] 운동 이후 그 중심지였던 이탈리아의 상업 도시가 [[레반트]] 무역을 독점하고 [[한자 동맹|한자 도시 동맹]]과 더불어 원거리 무역과 도시발달을 추진하였다. 화폐 경제의 농촌 침투는 지대의 금납화, 직영지의 해방을 비롯한 장원제의 해체를 촉진하는 한편 도시에서는 귀족화한 상인의 지배를 타파하는 [[길드]] 혁명이 진행되어 공장제 수공업화가 진전되었다. 뿐만 아니라 십자군 운동의 실패로 실추된 교황권이나 황제권을 대신하여 왕권이 강화되었다. 이리하여 관료제와 상비군을 정비하고 사치를 하기 위해 과세 증가가 기도되었으나 이를 견제하려는 도시인의 정치적 발언권과 충돌한 끝에 마침내 성직귀족, 세속귀족, 도시민을 대표하는 영국의 자문의회나 프랑스의 [[삼부회]] 같은 신분제 의회를 가지게 되어 중세 국가는 신분제 국가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왕권강화가 추진되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는 [[백년 전쟁]]이 일어났고, 교황은 프랑스 왕에 의하여 [[아비뇽 유수|아비뇽에 유폐]]되는가 하면, [[서방 교회의 분열|교회가 분열]]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교권의 쇠퇴와 왕권의 강화는 각국의 사정에 따라서 그 성격도 달랐다. 귀족 세력이 강했던 독일은 연방제 국가를 이루었고, 상업 자본이 축적되었던 이탈리아에서는 데스포트와 같은 전제군주제가 실현되었으며, [[
== 학문 ==
=== 철학 ===
{{본문|중세 철학}}
[[파일:Westerner and Arab practicing geometry 15th century manuscript.jpg|섬네일|200px|
중세 유럽에서 최초의 주목할 만한 연구 활동의 부흥은 [[카롤루스 대제]]가 [[피사의 피에트로]]나 [[알퀸]]의 조언을 받아 당시 고대의 철학을 보존하고 있었던 [[잉글랜드]]나 [[아일랜드]]의 학자를 초빙하고, [[787년]]의 칙령에 의해서 제국 내의 모든 수도원에 학교를 병설시켰을 무렵에 시작한다. 이러한 학교(scola)는 [[스콜라 철학]]의 이름의 유래가 되어 중세의 연구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시기의 철학적 활동 중에서는 고대의 저작을 필사하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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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과학이 그리스과학의 번역사업에서 비롯하였듯이, 서유럽 크리스트교국의 문화활동은 아라비아과학 ― 실질적으로는 아라비아어역의 그리스과학 ― 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데서 시작된다. 당시 아랍어를 번역할 수 있는 학자는 극소수였는데 11세기의 아프리카인 콘스탄티누스는 그 최초의 적격자였다. 그는 카시노산의 수도원에서 많은 아라비아 서적을 라틴어로 옮겨 놓았다. 그러한 번역서에는 막대한 지식과 경험이 채워져 있었다. 유럽의 진보적인 학자가 받은 자극은 통렬하였다.
원래 그리스원전(原典)의 아라비아역이라고 하는 것도, 그 중간에 시리아인이나 유태인에 의한 시리아역이라든가 헤브라이역이 개재한 일이 많다. 따라서 아라비아어의 라틴역은 실은 '그리스원전의 시리아역의 헤브라이역의 아라비아역의 라틴역'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러한 라틴역으로 그리스과학에 접하여 지식의 욕망을 자극받은 서유럽의 크리스트교도가 직접 그리스 원전에 접하고 그 원전으로부터 라틴어로의 직접 번역을 갈망하기에 이른 것은 자연적인 추세였다. 이리하여
=== 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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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는 고대의 문화와 사상을 바탕으로 기독교 사상에 의해 시대적 통일성이 형성된 시기로, 모든 분야에서 단결된 요소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중세의 종교적 통일성은 교육이념과 내용의 통일성을 가져왔으며, 단일한 교육제도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중세 전반에는 기독교 교화를 목적으로 한 기독교 학교제도가 발달하였다.
중세 중반기로 접어들면서 세속적 교육이 성장하였다. 게르만 민족의 교화책으로서 카롤루스 대제를 중심으로 한 교육사업이 전개되었고 봉건제도와 함께 기사교육이 정비되었다. 농민 계급을 위한 특별한 학교가 설립되지는 않았다. 농민 계급의 자녀들은 가정 안에서 생활과업을 배웠기 때문이다. 중세 후반에 이르러 봉건 제도가 붕괴되어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 예술 ==
=== 미술 ===
{{본문|중세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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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
* [[고대]]
* [[고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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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거 통제}}
[[분류:
[[분류:기독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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